본문 바로가기

歷史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7] 단군조선 연대기 30 서기전2239년 임인년(壬寅年)에 부루 천왕이 소련과 대련에게 다스림의 도(道)를 물었다.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는데, 사흘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으며, 1년 동안 슬퍼하였고, 3년 동안 근심에 젖어 있었다. 이때부터 풍속이 5개월 상을 치르던 것을 오래 할 수록 영광스럽게 여겼다. 즉 이때부터 부모상을 3년상으로 치른 것이 되는데, 송(宋)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하여 부친상(父親喪)은 만 2년인 3년상을, 모친상(母親喪)은 만 1년의 상(喪)을 모시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의 효(孝)] 소련과 대련의 효를 공자(孔子)도 칭송하였는 바, 예기(禮記) 잡기하(雜記下) 편에서 “소련과 대련은 상을 잘 치렀다(少連大連善居喪)”라고 적고 있으며..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6] 단군조선 연대기 29 단군조선(檀君朝鮮)은 일명 고조선(古朝鮮) 또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고도 하는데, 본래의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다. 조선(朝鮮)은 배달나라 또는 박달나라인 단국(檀國)의 정통계승국이다. 조선(朝鮮)이라는 글자와 소리는 단군조선 시대의 문자와 말이다. 즉 상형문자와 함께 그 문자를 읽는 소리가 있었던 것이 된다. 그 읽는 소리는 지금의 “조선”이라는 말소리보다는 “죠션”에 가까웠다고 보인다. 朝鮮를 “조선”이라는 읽는 소리는 음독(音讀)이 된다. 朝鮮을 훈독(訓讀)으로 읽으면 아사날, 아사나가 되어 지금의 말로는 “아침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이다. 선(鮮)은 “날”이라는 뜻을 가진 “생(生)”, 새롭다는 “신(新)”과도 통하는 글자이다. 조선(朝鮮)이라는 글자의 “朝”는 상형문자로서 그 읽는..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5] 단군조선 연대기 28 서기전2240년 신축년에 부루천왕은, 서기전2247년 이후에 우순(虞舜)이 허락없이 임의로 재설치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정벌하여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봉하여 그 공(功)을 표창하였다. 즉 동무와 도라 등이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산동지역의 남국(藍國) 인근에 설치된 유주와 영주를 정벌하니 부루천왕이 동무와 도라 등을 그 곳의 제후로 봉하였다는 것이다. [우순(虞舜)이 재설치한 유주, 영주를 다시 회수(回收)하다] 남국(藍國)은 산동지역에 위치하며 단군조선의 군후국(君侯國)의 하나인 군국(君國)으로서, 배달나라 시대 치우천왕(治尤天王)의 중심백성으로서 치우천왕의 후손이라 불리는데, 단군왕검 천왕이 조선(朝鮮)을 개국하자마자 치우천왕의 후손을 남국의 임금(君)으로 봉한 것이다. 남국(藍.. 더보기
조선왕조는 어찌하여 500년씩이나 갔을까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중에 일부분인데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대략 우리가 좀 비루하게 인식하기도 하는 조선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가 하는 부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4]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7 서기전2240년 신축년(辛丑年)에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뒤를 이어 천왕격이던 천제자(天帝子) 진한(眞韓) 태자부루(太子扶婁)께서 제2대 조선천왕(朝鮮天王)으로 즉위하였다. - 제2대 부루 천왕의 역사- 이후 조선(朝鮮)의 본 임금인 단군(檀君)을 천왕(天王)이라 한다. 시조 단군왕검은 천제(天帝)이시다. 단군이란 배달나라(檀國) 작은 임금을 의미하는데, 단군왕검이 배달나라 한웅천왕의 아들로서 천군(天君)이며 단군(檀君)으로서 조선(朝鮮)을 건국하였으므로 계속하여 단군(檀君)이라 부르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이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므로 한웅천왕(桓雄天王)의 뒤를 이은 천왕(天王)이라 하여야 한다. 단군조선 자체로서는 본 임금을 단제(檀帝)라 하면 되는데, 중앙조정(中央朝廷)의 본 임금이자 천자(天..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3]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6 우순(虞舜)은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에 치수(治水)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年)에 단군조선이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사공(司空)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태자부루로부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고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본격적으로 치산치수에 돌입하였고, 이후 우(禹)는 서기전2262년경까지 5년이내에 치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 된다. [우순(虞舜)의 반역(反逆) 재개(再開)와 처단(處斷)] 우순(虞舜)은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에 치수(治水)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2]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5 서기전2267년 이후 늦어도 서기전2247년 사이에 사공(司空) 우(禹)는, 직속신하인 백익(伯益)과 함께 동서남북의 명산대택(名山大澤)을 답사하면서, 지방유력자(地方有力者)를 찾아다니며, 산천의 맥리(脈理)와 지하자산(地下資産)과 새와 짐승과 곤충류와 민속(民俗)과 특이한 나라, 지역, 토지의 거리를 조사하여 인문지리책을 지었으니, 이를 산해경(山海經)이라 한다. [사공(司空) 우(禹)가 백익(伯益)과 함께 우공(虞貢)의 사례(事例)로 산해경(山海經)을 짓다] 우(禹)가 편찬한 원래의 산해경은 서기전2267년경부터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지어진 것이 되고, 이는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 때 태자부루로부터 치수법(治水法)을 전수받으면서 치수와 관련하여 명을 받은 우공(虞貢)의 사례(事例)에 속하는 것이..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1]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4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로부터 천국(天國)이 부여한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천부왕인(天符王印)과 깊이와 넓이를 재는 자(尺)인 신침(神針)과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담긴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 불리는 황구종(皇矩倧)을 전수받은 사공(司空) 우(禹)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全權)을 부여(賦與)받아 구주사악(九州四嶽)에 걸쳐 있던 홍수를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하다] 서기전2288년에 발행하여 서기전2267년까지 22년간 중원(中原) 땅 동서남북의 사악(四嶽) 사이에 걸쳐 마무리 되지 않던 대홍수를 사공(司空) 우(禹)가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상징하는 천부왕인으로써 필요한 인력(人力)과 장비(裝備)..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0]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3 도산회의를 계기로 하여 단군조선은 천자 순(舜)에게 천자 중의 천자로 격상시켜 산동지역의 제후국들인 구려(九黎)의 분조(分朝)들을 감독하는 책임을 부여하였다. 산동지역에는 청구(靑邱)와 남국(藍國)이 단군조선 초기부터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으로 존속하였으며, 수많은 소국(小國)들이 있었는 바, 우순으로 하여금 이들 소국들을 감독하게 한 것이다. [구려분정(九黎分政)과 감독자 천자(天子) 우순(虞舜)] 단군조선은 한배달 구족(九族)을 계승한 나라로서 구족을 거느린 제국(帝國)이다. 한배달조선의 구족은 파미르고원의 동쪽으로 동, 북, 남으로 퍼져 정착한 족속 모두를 가리킨다. 구족은 황족(黃族), 백족(白族), 현족(玄族), 남족(藍族), 적족(赤族), 양족(陽族), 우족(于族), 방족(方族), 견족(畎族).. 더보기
[홍익인간 7만년 역사 -69] 단군조선 연대기 22 서기전2267년 단군조선의 사자인 진한 태자부루께서 주관한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는 우(虞)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순(舜)이 단군조선 중앙조정의 허락이나 윤허없이 함부로 설치한 병주(幷州), 유주(幽州), 영주(營州)에 대하여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요(堯)가 기주(冀州)를 나누어 설치한 병주와 유주 중 병주는 그대로 두고, 유주와 청주에서 나누어 설치한 영주는 회수조치하여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편입시켰다. [우순(虞舜)이 설치한 유주(幽州), 영주(營州)를 회수하고, 우공(虞貢)을 시행하다] 처음 서기전2357년경 요임금이 설치한 9주는, 당(唐)의 수도인 평양(平陽)의 북쪽 지역인 태원(太原)을 포함한 기주(冀州), 평양의 동쪽지역으로 황하와 제수(齊水) 사이의 연주(兗州), 연주 남쪽..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