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歷史/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3]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6


우순(虞舜)은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에 치수(治水)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年)에 단군조선이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사공(司空)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태자부루로부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고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본격적으로 치산치수에 돌입하였고, 이후 우(禹)는 서기전2262년경까지 5년이내에 치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 된다.
 

[우순(虞舜)의 반역(反逆) 재개(再開)와 처단(處斷)]


우순(虞舜)은 사공(司空) 우(禹)의 간청으로 상국(上國)인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정(朝廷)에 치수(治水)에 관한 구원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기전2267년 갑술년(甲戌年)에 단군조선이 주관한 도산회의(塗山會議)에서 사공(司空)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태자부루로부터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받고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본격적으로 치산치수에 돌입하였고, 이후 우(禹)는 서기전2262년경까지 5년이내에 치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 된다.

이리하여 순(舜)임금의 나라는 물의 피해에서 해방되어 백성들이 제자리를 찾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차차 마련되어 시름없는 평화로운 태평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평화시대가 된 것을 기념하여 사공(司空) 우(禹)가 남악(南嶽) 형산(衡山)의 구루봉에 세운 비가 소위 우왕비(禹王碑)라는 우(禹)의 치수기념부루공덕비(治水紀念扶婁功德碑)인 것이다.

순임금은 도산회의에서 내려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명(命)에 따라, 5년마다 순행하며 산동반도 남쪽의 낭야성(琅耶城, 지금의 靑島)인 가한성(可汗城)에 행차하시는 진한(眞韓) 태자부루를 사악(四嶽)의 신하(臣下)를 거느리고 알현(謁見)하며 치수에 관한 보고를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공(虞貢)이다. 우공(虞貢)이란 우(虞)나라가 상국(上國)인 단군조선에 바치는 예(禮)이다.

한편, 우공(禹貢)은 중국역사가들에 의하여 그 의미가 왜곡되었는데, 원래 우공(禹貢)이란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되며, 우(禹)가 제후국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우(禹)가 제후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중국기록의 소위 우공(禹貢)은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하(夏)나라를 세운 이후가 된다. 원래 우공(禹貢)은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를 하면서 실시한 일을 순(舜)임금에게 보고하며 바친 것이 된다.

구주(九州)는 서기전2357년경 요(堯)임금 때 이미 설치되었고, 서기전2284년에 찬탈하여 스스로 천자(天子)가 된 순(舜)임금이 원래의 9주(州)에서 3주(州)를 나누어 추가 설치하였으며, 서기전2267년에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편입시키고 9주(州)에다 병주(幷州)가 그대로 있었으니 모두 10주(州)가 된다.

그리하여 9주(州)는 우(禹)가 처음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며, 우(禹)는 서기전2224년 자칭하왕(自稱夏王)이라 하면서 임의로 제후(諸侯)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아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로서, 단군조선으로 보면 봉(封)함이나 윤허(允許)없이 스스로 함부로 천자에 오른 천하(天下)의 반역자(反逆者)인 것이다.

단군조선의 보살핌으로 천하태평의 시대를 맞이한 우(虞)나라 천자 순(舜)임금은, 서기전2247년을 끝으로 이후에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께서 순행하지 않으시고 아사달에서 연로(年老)하신 단군왕검 천제(天帝)를 보필하며 내치(內治)를 하는 사이에, 철폐되었던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산동반도 서쪽의 남국(藍國) 인근에 재설치하였다. 즉 우순(虞舜)이 사전 승낙이나 윤허없이 함부로 땅을 나누어 설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천하질서(天下秩序)의 방침을 어기어 반역(反逆)한 것이다.

이러한 순임금의 반역행위를 단군조선에서 그냥 묵시하지 않았다. 진한(眞韓) 태자부루는 천자(天子) 우순(虞舜)의 소행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로 하여금 우순을 제거토록 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유호씨는 순(舜)이 비록 친자식이지만, 불효(不孝)와 불충(不忠)을 거듭하는 행태를 지켜보지만 않고 단군조선 중앙조정의 명을 받자마자 작은아들 유상(有象)과 치수에 공(功)이 큰 우(禹)를 시켜 순(舜)을 협공(協攻)으로 치도록 하였던 것이다.

순임금이 반역한 때는 서기전2247년 이후이자 서기전2224년 사이가 된다. 순임금은 유호씨의 명을 받은 이복동생 유상(有象)과 우(禹)의 협공을 받아 전쟁 중 남방으로 피하여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이때 순임금의 두 아내도 강물에 투신자결하였던 것이며, 이후 왕권(王權)을 탐낸 우(禹)가 반역하여 하(夏)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단군왕검(檀君王儉) 천제(天帝)의 어천(御天)]


배달나라 천군(天君)이던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선, 서기전2370년 신묘년 5월 2일에 탄생하여 서기전2357년 14세에 웅씨국인 단웅국(檀熊國)의 비왕(裨王)으로 24년간 섭정하다, 요(堯)의 전란(戰亂)을 피하여 서기전2333년 무진년 10월 3일에 동북의 아사달에서 조선(朝鮮)을 개국하였으며, 10년후인 서기전2324년경에 요(堯)를 굴복시켜 천자(天子)로 삼아 명실상부한 조선천국(朝鮮天國)을 정립시켰다.

진한(眞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봉하여 비왕(裨王)으로 삼아 섭정케 하였으며, 이에 따라 태자부루가 천왕격(天王格)의 진한(眞韓)이 되어 총괄섭정을 하였다. 삼한(三韓)이 천왕격이므로 단군조선의 초대 천왕(天王)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은 천제(天帝)로 모셔진다.

서기전2333년부터 조선천국(朝鮮天國)을 다스리기 93년째인 서기전2241년 경자년(庚子年) 음력 3월 15일에 단군왕검 천제(天帝)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하시니 교외 10리즘에 장사지냈다. 이때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듯 단기(檀旂)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경배(敬拜)하였다.

단기(檀旂)는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하는 색인 빨강, 파랑, 노랑으로 된 깃발이며, 단군왕검이 승하하심을 경배하던 흔적이 지금의 댕기에 담겨져 수천년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된다. 댕기는 빨강, 파랑, 노랑의 세가지 천연색으로 된 헝겊으로 머리카락을 묶은 것이다. “단기”의 소리가 받침 “ㄴ”이 뒷소리의 자음 “ㄱ”의 영향으로 “ㅇ”으로 변하여 “당기”가 되고, “당기”는 다시 “l 모음 역행동화"로 "댕기"가 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삼사오가(三師五加)와 삼한(三韓)64족(族)의 나라이다. 삼한64족은 한배달 9족(族)이며, 삼사오가가 곧 소위 팔가(八加)로서 8방의 각 8부(部)가 되어 모두 64부족이 되는 것이다.

단군조선의 삼사오가 등 기본적인 정치제도는 각 지방의 제후국이나 부족, 씨족, 부락, 작은 마을에 이르기까지 적용되었다. 즉 단군조선은 중앙의 삼사오가제도가 각 지방말단까지 시행된 나라로서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원리가 그대로 반영된 무위자연(無爲自然), 무한창조(無限創造)의 나라였던 것이다. 10월상달에는 한국(桓國)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제천(祭天) 행사를 벌이는 등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었다.

서기전2241년 음력 3월 15일에 단군왕검께서 130세로 승천하시니 후대에 음력으로 3월 15일을 어천절(御天節)이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