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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

[홍익인간 7만년 역사 -74] 단군조선(檀君朝鮮) 연대기 27


서기전2240년 신축년(辛丑年)에 단군왕검 천제(天帝)의 뒤를 이어 천왕격이던 천제자(天帝子) 진한(眞韓) 태자부루(太子扶婁)께서 제2대 조선천왕(朝鮮天王)으로 즉위하였다. 

 
- 제2대 부루 천왕의 역사-

 
이후 조선(朝鮮)의 본 임금인 단군(檀君)을 천왕(天王)이라 한다. 시조 단군왕검은 천제(天帝)이시다. 단군이란 배달나라(檀國) 작은 임금을 의미하는데, 단군왕검이 배달나라 한웅천왕의 아들로서 천군(天君)이며 단군(檀君)으로서 조선(朝鮮)을 건국하였으므로 계속하여 단군(檀君)이라 부르는 것이 된다.

단군조선이 배달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므로 한웅천왕(桓雄天王)의 뒤를 이은 천왕(天王)이라 하여야 한다. 단군조선 자체로서는 본 임금을 단제(檀帝)라 하면 되는데, 중앙조정(中央朝廷)의 본 임금이자 천자(天子)등 제후(諸侯)를 둔 상국(上國)의 임금으로서 천왕(天王)이라 하는 것이다.

진한 태자부루가 제2대 천왕이 됨으로써 진한(眞韓)이라는 비왕(裨王)의 명칭은 없어지고 진한관경은 그대로 적용된다.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비왕(裨王)으로서 천왕격(天王格)의 임금이 되며 위계질서로는 천왕(天王) 바로 아래가 된다.

태자(太子)라는 말은 황제(皇帝)의 아들로서 이미 단군조선(檀君朝鮮)에서 사용하였다. 단군조선 자체에서 태자(太子)라는 말을 쓴 것이며, 천자국 등 제후국에서는 천제자(天帝子), 천왕자(天王子)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천제(天帝)이신 단군왕검의 아들인 태자부루는 천제자(天帝子)이다. 또, 하늘로 돌아가신 천왕(天王)은 삼신사상(三神思想)에 의하여 천제(天帝)로 모셔진다.

부루천왕의 탄생일은 지금까지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서기전2267년에 이미 도산회의를 주관하는 등 진한(眞韓)으로서 비왕(裨王)으로 섭정을 하였던 것이며, 조선이 건국된 서기전2333년에는 단군왕검 천왕이 38세로 이때 이미 태자부루가 계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기전2333년경에 태자부루가 탄생하였다면, 서기전2267년에는 67세가 되며, 순임금은 서기전2343년생이니 이때 77세로서 약 10살 차이가 나는 것이 된다. 부루천왕이 58년 재위하여 서기전2183년 무술년에 승하하실 때는 151세 정도가 되게 되어, 130세를 사신 단군왕검보다 20여세를 더 산 것이 된다.

한편, 서기전2280년에 아버지 곤(鯤)이 순임금에게 처형당하고서 우(禹)가 치수담당으로 봉해졌는 바, 이때 우(禹)가 약 30세라 하면, 서기전2310년경 출생이 되어, 부루단군보다 20여세 아래가 된다. 우(禹)는 서기전2198년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有戶氏)와 전쟁 중에 모산(茅山)이 되는 회계산(會稽山)의 진중(陣中)에서 사망하였는데 약113세를 산 것이 된다. 순임금은 서기전2343년부터 서기전2224년까지 120세를 살았다.

[학문 진흥 (學文振興)]

서기전2240년 신축년에 부루천왕이 기숙사(寮)를 설치하여 배움을 일으키니 문화(文化)가 크게 진흥하였다. 원래 문화(文化)란 문치교화(文治敎化) 이전의 학문교화(學文敎化)로서 글을 통한 배움으로 인하여 교화된다는 의미이다. 즉 구전(口傳)이 아니라 문서(文書)로서 지식(知識)이나 철학(哲學) 등의 학문이 교육을 통하여 전수(傳授)됨으로써 사회와 국가가 발전되어 간다는 것이다.

단군조선 초기에 이미 학교 형태로 배움의 길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배달나라 시대에는 스승과 제자의 사사(私師)형태로 배움이 전수되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지금의 학교와 같은 공공기관이 설치되어 공식적인 학문전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문자(文字)시대인 배달나라 시대에 이미 학문이 발전하였다. 이미 육서법(六書法)이 정립되어 있어서 적지 못할 내용이 없게 되었으며, 기록에 의한 배움이 이루어지고 그에 더하여 더욱더 깊고 높은 경지로 학문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삼사오가(三師五加) 중 운사(雲師)에 속하는 양가(羊加)는 교육을 담당한다. 교육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아니하면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가정(家庭)을 넘어선 교육을 통하여 공동선(共同善)의 철학이 정립되며, 절대적 상대적 선악(善惡)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팔정(八政)에 사도(司徒)라는 기관이 곧 교육기관이다. 순(舜)임금이 설(契)을 사도에 임명하였다고 기록된다. 이 사도는 단군조선으로 보면 양가(羊加)의 업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부루천왕 때 단체를 위한 교습기관을 설치하여 학문이 진흥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한웅천왕(桓雄天王)이 개천(開天)한 배달나라 초기에 이미 원방각(圓方角)의 천지인(天地人) 삼태극(三太極) 사상과 상형문자가 되는 녹서(鹿書)가 있었으며, 서기전3500년경 이미 배달나라 태우의(太虞儀) 한웅(桓雄)의 묵념청심(黙念淸心), 조식보정(調息保精) 등의 장생구시법(長生久視法)이 있었고,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원방각(圓方角) 삼태극론(三太極論)이 있었으며, 태호복희(太皞伏羲)의 하도(河圖)와 8괘역(卦易)과 60갑자(甲子)의 철학(哲學)과 서체로는 용서(龍書)가 있었다.

또, 서기전2700년경 자부선인(紫府仙人)이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가르친 삼황내문경(三皇內門經)이 있으며, 칠성력(七星曆)의 기초인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와 한역(桓易)을 복원한 윷놀이가 있으며, 당시 서체(書體)로는 우서(雨書)와 화서(花書)가 있었고, 이후 창기소(蒼其蘇)가 부연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기록된, 황구종(皇矩倧) 즉 홍범구주(洪範九疇)의 근원이기도 한 황부중경(黃部中經)이라는 책도 엄연히 존재하였던 것이 된다.

이러한 역학(易學), 역학(曆學)과 철학(哲學) 등에 관한 학문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서기전2200년경의 부루천왕 시대에 학문이 크게 진흥되었다는 것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