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전2267년 도산회의에서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로부터 천국(天國)이 부여한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증명하는 증거물인 천부왕인(天符王印)과 깊이와 넓이를 재는 자(尺)인 신침(神針)과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이 담긴 금간옥첩(金簡玉牒)이라 불리는 황구종(皇矩倧)을 전수받은 사공(司空) 우(禹)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全權)을 부여(賦與)받아 구주사악(九州四嶽)에 걸쳐 있던 홍수를 본격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하다]
서기전2288년에 발행하여 서기전2267년까지 22년간 중원(中原) 땅 동서남북의 사악(四嶽) 사이에 걸쳐 마무리 되지 않던 대홍수를 사공(司空) 우(禹)가 천상왕권(天上王權)을 상징하는 천부왕인으로써 필요한 인력(人力)과 장비(裝備)를 동원하여 부역(負役)을 실시함으로써 22년간이나 끝나지 않던 홍수를 마무리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호구산(壺口山)에서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거쳐, 태원(太原)을 지나 태악산(太岳山)을 거치고, 다시 황하(黃河)를 거쳐 제수(齊水)를 넘어 태산(泰山)을 거쳐 회대(淮岱)지역을 지나, 형산(衡山)과 형산(荊山)을 거치고, 화산(華山)을 지나 황하상류(黃河上流)에 걸쳐, 그 사이에 있는 중원 땅인 기주(冀州), 연주(兗州), 청주(靑州), 서주(徐州), 양주(揚州), 형주(荊州), 양주(梁州), 옹주(雍州), 예주(豫州) 등 구주(九州)가 물에 빠져 있던 것을, 사공(司空) 우(禹)가 산(山)을 다스리고 물길을 다스려 백성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사공 우가 다스린 물길은 모두 9개의 강(江)이 되는데, 흑수(黑水), 위수(渭水), 약수(弱水), 황하(黃河), 제수(齊水), 회수(淮水), 장강(長江), 한수(漢水), 낙수(落水)이다. 흑수는 삼위산(三危山)을 거쳐 흐르는 강이고, 위수는 섬서성 함양(咸陽) 부근을 흐르는 강이며, 약수는 감숙성의 합려산(合黎山)을 경유하고, 낙수는 하남성 낙양(洛陽)를 지나 언사(偃師)를 지나 황하(黃河)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리하여 우(禹)는 태자부루(太子扶婁)의 가르침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중원(中原)의 둘레에 있는 산과 강을 잘 다스려 결국 22년간 지속된 홍수를 마무리하였던 것이며, 이에 우(禹)는 치수의 공(功)으로 신망을 얻어 백성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고, 치수에 동참하였던 무리들의 맹목적인 충성으로 인하여 하(夏)나라 왕조(王朝)가 생기게 된 것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치수를 마무리 하고서 순(舜)임금에게 임무를 완수하였음을 보고하였으며, 순임금은 도산회의 이후 5년차인 서기전2262년에 산동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가한성(可汗城)에 행차한 단군조선의 진한(眞韓) 태자부루께 치수에 성공하였음을 보고하였던 것이다.
[사공(司空) 우(禹)가 남악(南岳) 형산(衡山) 구루봉에 “치수기념 부루공덕 비(治水紀念扶婁功德碑)”를 세우다]
서기전2267년 이후 치수에 성공한 우(禹)는 홍수의 최대 중심지가 되는 양자강의 남쪽에 위치한 형산(衡山)의 구루봉 정상에 9행으로 모두 77자를 새긴 치수기념공덕비(治水記念功德碑)를 세웠다. 비를 세운 때는 서기전2262년경에서 서기전2247년 사이라 추정된다.
원래의 치수기념공덕비의 비문은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되어 있는데, 명(明)나라 시대 사람인 양신(楊愼)이 번역한 석문(釋文)이 있어 그것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께서 여러 좌우의 대신들에게 말씀한 바대로, 물이 차 섬이 되어버린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새와 짐승들이 드나드는 곳에 오르기도 하였도다! 온몸으로 직접 홍수를 체험하면서 밝게 펴 일으켰도다!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집을 잊었고, 악록산을 뜰 삼아 잠을 자기도 하였도다! 슬기롭게 수행하며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마음은 심히 새롭게 되지 못하였도다! 마음의 평정을 구하기 위하여 화악태형(華岳泰衡)으로 갔으나, 산마루는 트였으되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쇠퇴하였도다! 신(神)에게 제사 올리기에 힘쓰니, 막힌것과 어두움이 사라지고, 남독의 범람이 걷혀지고, 옷가지가 갖추어지고 먹을 것이 마련되었도다! 온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춤추는 시대여 영원하여라!(楊愼禹碑釋文 : 承帝日咨,翼輔佐卿。洲諸與登,鳥獸之門。參身洪流,而明發爾興。久旅忘家,宿嶽麓庭。智營形折,心罔弗辰。往求平定,華岳泰衡。宗疏事衰,勞余神禋。鬱塞昏徙。南瀆愆亨。衣制食備,萬國其寧,竄舞永奔。)
위 풀이는 우(禹)의 치수에 관한 고대중국의 기록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곤(鯤)은 요(堯)임금 때에 홍수를 막으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순(舜)임금은 곤의 아들 우(禹)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우는 노심초사하며 치수에 열중하여 13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있었으며, 때로 자기 집을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들어가지 않았다. 평지를 갈 때는 수레를 타고, 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진흙길에는 썰매를 타고, 산을 오를 때는 나무신을 신고 다니면서 조사하였다. 그리하여 구주에, 9개의 물길을 열고 9개의 늪에 제방을 샇아 수해를 막고 9개의 산을 측량했다. 우는 이를 순임금에게 보고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측에서는 우(禹)가 세운 치수기념비를 소위 우왕비(禹王碑)라 하는데, 우(禹)는 서기전2224년에 하(夏)나라를 세워 왕조(王朝)의 시조가 되었는 바, 서기전2267년 치수 당시 우(禹)는 하나라 왕이 아니라 순임금의 신하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에 있었으므로, 우의 치수기념비는 치수에 성공한 후 기념비를 새긴 것으로서, 소위 우왕비라는 말은 잘못 된 것이며, 사공(司空) 우비(禹碑) 또는 그냥 우비(禹碑)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禹)가 치수기념으로 세웠다는 소위 우비(禹碑)에서는 신(神)에게 제(祭) 올리기에 힘써 치수가 완성되었다는 취지로 적고 있는데, 이는 우비(禹碑)가 우(禹)의 치수기념비(治水記念碑)이자 특히 신(神)으로 대입된 태자부루의 공덕(功德)을 칭송한 비(碑)가 된다. 즉 여기서 신(神)은 곧 삼신(三神)의 화신(化身)이자 상제(上帝)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며, 천사(天使) 태자부루를 가리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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