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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

[홍익인간 7만년 역사 -69] 단군조선 연대기 22


서기전2267년 단군조선의 사자인 진한 태자부루께서 주관한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는 우(虞)의 사공(司空) 우(禹)에게 순(舜)이 단군조선 중앙조정의 허락이나 윤허없이 함부로 설치한 병주(幷州), 유주(幽州), 영주(營州)에 대하여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요(堯)가 기주(冀州)를 나누어 설치한 병주와 유주 중 병주는 그대로 두고, 유주와 청주에서 나누어 설치한 영주는 회수조치하여 단군조선 직할영역으로 편입시켰다. 


[우순(虞舜)이 설치한 유주(幽州), 영주(營州)를 회수하고, 우공(虞貢)을 시행하다]
 

처음 서기전2357년경 요임금이 설치한 9주는, 당(唐)의 수도인 평양(平陽)의 북쪽 지역인 태원(太原)을 포함한 기주(冀州), 평양의 동쪽지역으로 황하와 제수(齊水) 사이의 연주(兗州), 연주 남쪽으로 태산 서쪽의 산동서부가 되는 청주(靑州), 청주 남쪽으로 회수(淮水) 사이의 서주(徐州), 서주 남쪽으로 양자강 유역의 양주(揚州), 양주 서쪽으로 형산(衡山)과 형산(荊山) 사이의 형주(荊州), 형산(荊山)과 황하 사이의 예주(豫州), 형주 서북으로 화산(華山) 사이의 양주(梁州), 양주 북쪽으로 기주 사이의 옹주(雍州)이다.

서기전2284년경 순임금이 추가로 설치한 3주는, 기주(冀州)를 나누어 태원(太原) 북쪽은 병주(幷州), 기주의 동쪽이 되는 병주의 동쪽은 유주(幽州), 청주(靑州)에서 나누어 설치한 영주(營州)이다.

서기전2267년경 유주와 영주를 단군조선의 직할영역으로 편입시킬 때, 유주에 있던 소성(蘇城)이 편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소성의 성주이던 소씨(蘇氏)가 단군조선 말기에 동쪽으로 이동하여, 서기전209년이 되던 해에 소백림(蘇伯琳)이 마한 땅인 한반도의 동쪽 지역에 자리잡고 진한(辰韓)을 건국하였던 것이 된다.

우순(虞舜)의 유주는 단군조선 영역으로 편입되어 고죽국(孤竹國)으로 봉해졌으며, 영주는 남국(藍國)에 합쳐진 것이 된다. 고죽국은 하(夏)나라가 세워진 서기전2224년 이전부터 존속하던 단군조선의 군국(君國)이 된다.

순임금 시대의 사악(四嶽)은 북쪽은 북악인 태항산(太行山)의 항산(恒山), 동쪽은 동악인 태산(泰山), 남쪽은 남악인 형산(衡山), 서쪽은 서안 부근의 태화산(太華山)인 서악 화산(華山)이다. 이를 화악태형(華岳泰衡)이라 한다. 각 화산, 북악, 태산, 형산이다. 서기전2267년 이후 서기전2247년경 사이에 사공 우가 남악 형산 구루봉에 세운 치수기념 비문에 화악태형(華岳泰衡)이라 적고 있다.

도산회의에서 태자부루는 치산치수에 관한 과업을 5년마다 순행할 때 우순과 사공 우는 낭야성(琅耶城)에서 보고하라 조치하였다. 낭야성은 단군조선 번한(番韓)의 5경 중 남경(南京)이 되는 가한성(可汗城)으로 서기전2311년에 개축된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감시하기 위한 성(城)이다.

이리하여 사공(司空) 우(禹)는 단군조선의 치산치수(治山治水)에 관한 전권(專權)을 부여받아 산과 물을 다스려 치수에 성공하여 마무리 하였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사공 우(禹)는 신하 백익(伯益)과 더불어 온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리(地理) 등을 저술하니 세상에 전하는 산해경(山海經)인 것이며, 이는 우(禹)가 순(舜)임금에게 보고하는 우공(禹貢)의 하나로서, 다시 우순(虞舜)이 단군조선 진한 태자부루에게 보고하던 우공(虞貢)의 한 사례(事例)인 것이다.

우공(虞貢)은 서기전2267년부터 5년마다 1회씩 4회하여 서기전2247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후 단군조선의 진한 태자부루가 단군왕검 천제께서 연로하시어 내치(內治)에 역점을 두어 순행하지 않게 되니, 서기전2247년 이후에 우순(虞舜)이 다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산동지역의 남국(藍國) 근처에 설치하는 등 배신하기에 이르렀다.


[감우(監虞)를 낭야성(가한성)에 설치하다]


서기전2311년에 개축된 낭야성(琅耶城)은 가한성(可汗城)이라 불렀으며, 서기전2267년 도산회의를 계기로 가한성에 감우(監虞)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순임금과 우(虞)나라를 감독하는 역할을 하였다.

즉, 감우(監虞)에서 순임금과 순임금의 나라인 우(虞)나라의 정사(政事)를 감독한 것이며, 5년마다 1회씩 순행하던 진한(眞韓) 태자부루가 순임금으로부터 치산치수에 관한 우공(虞貢) 즉 국정(國政)을 보고받았던 것이 된다.

감우(監虞)는 우공(虞貢)을 행한 서기전2267년부터 서기전2247년까지 약 20년에 걸쳐 행해졌으며, 이후 순임금이 도산회의 때 환수되었던 유주와 영주를 산동 서쪽에 다시 설치하고 단군조선 백성들을 쫓아내는 등 반역함으로써, 제2대 부루단군 천왕 때 단군조선의 사자(使者)이던 유호씨(有戶氏)에 의하여 유상(有象)의 군사와 우(禹)의 군사의 추격으로 서기전2224년에 두 아내와 함께 창오의 들로 피난하던 순(舜)이 제거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