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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기황후>의 왕유, 충선왕과 충혜왕의 합성 캐릭터?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④ 드라마 17부에서 20부까지는 주로 왕유(고려 폐주)가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권신인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을 공격하는 부분으로 원 순제(혜종 : 후에 기황후의 남편)의 황권을 되찾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왕유는 엘테무르(연철) 대승상을 제거하기 위해 괴문서를 작성하여 붙이기도 하고, 황태후와 공모(共謀)하여 잔존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시청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그 이전에 왕유가 당했던 대우나 서러움과 고통 등을 본 시청자들은 이 고려 폐주(왕유)가 원나라의 현실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순제 당시에 고려왕이 돌궐을 무찌른 적도 없고 고려왕이 이에 대해 공을 세운 적도 없다... 더보기
<기황후>가 왜곡한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③ 드라마 17부에는 원나라의 황태후(皇太后)가 왕유(前고려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을 권유하는데, 왕유가 이를 사양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자 황태후는 "혼사(婚事)를 불편해하니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원나라 황실에서 폐주에게 황녀와의 결혼을 추진하는 의아한 상황이다. 한국에서는 오랜 세월을 이상하게 고려와 원나라의 결혼동맹에 대해 폄하(貶下)하는 것이 무슨 지성(知性)의 조건처럼 생각되어 왔다. 또 마치 원나라가 고려왕에게 강압적으로 결혼을 강요하였고(한국의 대부분의 관련 자료들의 논조가 이렇다.), 그 결혼동맹이 원나라의 식민지가 되는 지름길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잘못된 역사교육의 탓이다. 결혼을 애걸한 것은 애초에 고려 왕실이었기 때문이다. .. 더보기
<기황후>, 몽골군이 고려인을 총알받이로 동원했다고?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②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 방송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타 배우들의 호연으로 월화극 정상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는 월화극 독주체제를 이어가며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원작인 가 e-book 베스트셀러 순위 8위와 9위에 올랐다고 한다. 기황후의 파란만장한 삶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의 지지를 얻어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순위에 진입한 것이라는 데, 드라마의 극본을 맡은 작가 2인이 직접 집필함으로써 드라마 의 전개와 비교하며 보는 재미를 선사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인기를 떠나서 냉정히 바라보면 이 드라마는 상당히 심각한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 역사를 작가의 상상에 맡기다 첫째, 기황후 관련 사료가 부족한데도 전문가들의 조언을 제대로 받지 .. 더보기
MBC <기황후>, 제작 전에 역사 공부 좀 하지… , 한·몽 관계를 왜곡하다 ① 문화방송(MBC)이 50부작으로 기획한 드라마 가 큰 화제를 몰면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이 드라마는 제작 발표회 단계에서부터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담당 PD가 "기황후에 대한 기록 자체가 상당히 단출하고, 원나라의 역사 자체가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다. 기황후 내용은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역사드라마를 단순히 드라마로 생각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제작진이 봤더라면… 그 동안 '기황후'의 역사왜곡에 대한 부분은 주로 기황후, 기황후의 족벌 세력, 충혜왕 등 에 국한되어있다. 즉 국내에서는 기황후를 필두로 기 씨 일족이 조국인 고려에 온갖 악행을 저.. 더보기
독립 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는가? 독립 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는가?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문서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잠시 일본에게 외교권을 맡긴다는 항변. 그것이 매국의 시작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9일에 이완용이 데라우치에게 쓴 편지에는 3.1운동을 잠재우는 방법이 적혀있습니다. 내선인동화,국어보급이 그것입니다. 1919년 1월 고종이 덕수궁에 승하합니다. 그리고 고종장례식 이틀로 다가왔을 때 3.1운동은 서울로 시작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1운동은 친일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할정도로 그 여파는 컸고 이완용도 다른 친일파처럼 자신에게 이것이 친일파 딱지를 떼어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독립운동을 제압하는 방법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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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민족 부여가 경상도 김해까지 왔다는 한.일사학계 (백과사전) 부여[夫餘]는 만주 서북부에 있던 예맥족의 고대국가로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puhu'와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으나,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이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BC 2세기 무렵에는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마여--> 의려--> 의라로 왕위가 이어진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 69년(121) 고구리가 1만 군사로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막아 싸우게 하니 고구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이듬해 태조대왕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고.. 더보기
호태왕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한 일본 (백과사전의 설명)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末松保和]가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삼한(三韓)을 통제했다고 한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