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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기마민족 부여가 경상도 김해까지 왔다는 한.일사학계



(백과사전)
부여[夫餘]는 만주 서북부에 있던 예맥족의 고대국가로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puhu'와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으나,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이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BC 2세기 무렵에는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인들이 스스로 오랜 옛날 다른 곳에서 옮겨온 사람들의 후예라 했고, 〈위략(魏略)〉에는 부여가 북쪽에서 이주해온 시조 동명(東明)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것으로 보아 부여의 중심 집단은 만주 이외의 지역에서 이동해온 것으로 추측되나 그 시기나 경로는 분명하지 않다.

(편집자 주)
부여(夫餘)의 기원 : 북애자 노인이 쓴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국조 단군왕검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부루(夫婁)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나머지 세 아들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에게는 서쪽 땅을 주어 다스렸다고 한다. 부여라는 나라 이름은 왕검의 4째 아들로부터 온 것으로, 부여는 대대로 조선대연방의 일원으로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약수를 설명하는 아래 중국사서의 기록 중에 부여(夫餘)와 읍루(挹婁)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 강역을 밝히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번역)“<후한서 동이전> 부여국 북쪽에 약수가 있다.
<진서 사이전> 읍루국 동쪽 변에 대해가 있고 북쪽 끝이 약수이다.
<호위우공추지> 약수는 산묘위 서남 궁석산에서 나와 동북으로 거연택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돌아오는 곳을 모른다. 약수는 연택에서 동북류해 부여를 지나 읍루의 북쪽 경계를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원문) 《后汉书东夷传》夫余国北有弱水,《晋书四夷传》挹娄国东滨大海,北极弱水,《胡渭禹贡锥指》弱水出山庙卫西南穷石山,东北入居延泽,其下流不知所归,似弱水自居延泽东北流,厯夫余,挹娄之北境而归于东海,
(필자 주 : 여기서의 동해는 청해호 또는 감숙성을 흐르는 황하로 보인다.)

<후한서>와 <진서>의 기록에 약수 남쪽에 부여국과 읍루가 있었다는 설명인데, 그곳은 바로 지금의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을 말하는 것이다. 감숙성은 돈황석굴에서 고구려벽화가 발견된 곳이고, 청해성은 현재 서장족(티베트족)이 살고 있는 곳으로 현재 중국 정부와 민족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지역으로, 그 원인은 그쪽이 대대로 조선대연방(朝鮮大聯邦)과 고구리(高句麗)연방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 약수는 내몽고자치주 서남부에서 발원해 감숙성을 지난다. 그 남쪽에 부여와 읍루가 있다는 설명이다.

▲ 감숙성 돈황석굴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고구려 벽화이다. 이 벽화가 그려진 이유를 약수가 풀어주고 있다.

위 <후한서 동이전>와 <호위우공추지>에 언급된 부여국은 과연 어떤 부여일까? 왜냐하면 부여국은 우리 역사에는 아래와 같이 많은 부여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대부여(大夫餘)
B.C 2333년 단군왕검에 의해 세워진 조선은 B.C 425년 44대 구물단군이 즉위하면서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꿔 부르게 된다. 그 전에 우화충이 서북(西北)에서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점령하자 43대 물리단군이 피신하고는 곧 붕어하고 만다. 상장(上將)인 구물이 우화충의 반란을 진압하자 장수들에 의해 단군으로 추대된다. 단군의 혈통이 바뀌다보니 국호가 바뀐 것으로 보이는데, 구물단군이 국호를 부여로 쓴 것으로 보아 조선의 서부(=감숙성/청해성) 출신이 아닌가 한다.

(2) 북부여(北夫餘)
B.C 239년 해모수가 정변을 일으키자 조선(대부여)의 마지막 47대 고열가단군은 제위를 버리고 입산하게 되고, 5가(五加)에 의한 공화제가 6년간 실시된 후 해모수가 오가를 회유하여 공화제를 철폐하고 단군으로 추대된다. 이를 역사적으로 북부여라고 한다. 단군의 혈통이 바뀌다보니 국호도 대부여(=조선)에서 북부여로 바뀐 것이다.

(3) 졸본부여(卒本夫餘)
북부여의 4세 해우루단군 때인 B.C 108년 한무제(漢武帝)가 번조선을 공격해 내란으로 망하게 하고 4군을 설치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자, 대부여(=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단군의 후손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호를 동명(東明)이라 한다. 이를 졸본부여라 하는데 나중에 북부여를 접수하게 됨으로 저절로 북부여로 변모한다.

(4) 동부여(東夫餘) 또는 가섭원(迦葉原)부여
한나라를 격퇴하고 힘이 강성해진 고두막한이북부여 해우루단군에게 도성을 옮기라고 협박하자 병을 얻어 붕어하고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한다. 역시 고두막한이 계속 압박하자 해우루는 항복하고 제후가 되어 통하(通河)의 물가인 가섭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를 역사적으로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라고 한다. 졸본부여의 동명왕 고두막한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북부여의 5대 단군으로 즉위한다.

B.C 58년 고주몽이 북부여 6대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잇고는 국호를 북부여에서 고구리로 바꾸게 된다. B.C 47년 동부여 해우루 왕의 뒤를 이어 금와(金蛙)가 즉위하고, 금와 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3세 대소(帶素) 왕이 A.D 22년 고구리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대소의 동생이 갈사국을 세우게 된다. 이를 일명 갈사부여(曷思夫餘)라고도 한다. 갈사국은 3세 47년 만인 A.D 68년 고구리에게 항복하고 동부여후(東夫餘候)로 책봉된다.

(5)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
대소 왕의 6촌 동생이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투항하자 고구리는 그를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즉 고구리의 제후가 된 것이다. 뒤에 자립하여 개원(開原) 서북으로부터 옮겨가니 연(燕)나라 땅과 가까웠다고 한다. 문자명제 때인 494년 나라를 들어 바치고 아예 고구리 연나부에 편입된다. 이를 연나부부여(椽那部夫餘)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주: 연나라 땅은 황하변 하남성) 

(6) 정체불명의 부여
또한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언급되는 의려국(依慮國)이 있는데, 의려국의 왕인 의라가 선비 모용괴에게 쫓겨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연나부부여의 후손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아래 언급된 위구태 이후에 간위거--> 마여--> 의려--> 의라로 왕위가 이어진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 69년(121) 고구리가 1만 군사로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막아 싸우게 하니 고구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이듬해 태조대왕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고구리 군사를 부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부여는 고구리와 적대관계에 있던 또 하나의 정체불명의 부여로 보인다. 

이 부여의 정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미 고구리의 제후가 된 후동부여 또는 연나부부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단지 고구리와의 현토성과 요동 전투에 후한(後漢)에 원군을 보낸 것으로 보아 유주(幽州) 일대에 있던 또 하나의 다른 부여이거나, 혹은 고구리에서 자립한 연나부부여가 중국의 후한 쪽으로 붙어 고구려와 적대관계로 변한 것이라는 추론은 가능하다.

(7) 남부여(南夫餘)
백제도 고구리와 마찬가지로 부여(동부여)로부터 나온 나라이기 때문에 황족의 성이 부여(夫餘)이다. 26대 성왕 16년(538) 봄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이렇듯 우리 역사 기록에 8개의 부여가 나오기 때문에, <후한서 동이전>와 <호위우공추지>에 언급된 약수(弱水) 남쪽이 있던 부여가 어떤 부여인지 정확하게 결론내기는 어려우나,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졸본부여나 동부여 또는 연나부부여나 남부여(백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론을 내자면 감숙성에 있는 약수 남쪽은 대부여(조선)와 북부여(고구려)의 서쪽 강역으로 보인다. 즉 우리 민족의 역사 강역임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 대부여(조선)와 북부여(고구리)는 산서성에 도읍을 두고 동쪽 한반도/만주에서부터 중국대륙을 지나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한 연방대제국이었다. 약수는 조선의 서쪽 땅으로 흉노의 근거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