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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일본과의 역사전쟁 - 조작된 신공왕후의 삼한정벌


신공왕후의 조작된 삼한정벌에 근거한 정한론


신공왕후(神功皇后, 170~269)의 이름은 오키나가타라시노히메미코토(気長足姫尊, 息長足姬尊), 오오시타라노미코토(大帯比売命), 대족희명왕후(大足姫命王后)로 전한다. 아버지는 가이카(開化) 왕의 현손 오키나가노스쿠네노미코(息長宿禰王)로, 어머니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의 후손 카츠라기노타카와카히메(葛城高顙媛). 오진(応神) 왕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고 201년 ~ 269년간 섭정을 하였다고 전한다. 연대에 대하여는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셈하여 120년을 더하면 321년 ~ 389년간 섭정하였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구 왕후의 섭정 시기는, 중국의 삼국지에 기록된 히미코(卑彌呼)의 시대와 비슷하며, 일본서기 9권에 진구 왕후 섭정 66년 진 무제 태초 2년 진의 사신을 맞으러 가고 태초 2년 10월 왜 여왕이 먼 곳에서 와서 공물을 바쳤다고, 중국에서 기록된 왜 여왕에 대한 기술이 인용되었다. 이 때문에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되면서 야마토(大和) 조정과 히미코를 관련지으려는 의도로 전승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고 여기는 설이 있어 에도시대까지는 히미코가 진구 왕후이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장기간에 걸쳐 일본의 왕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일본 왕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이 해는 266년에 히미코(卑弥呼)는 벌써 사망하고, 이때의 여왕은 이요(壹與, 토요(臺與))가 다스린 시대였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나오키 코지로(直木孝次郎)는 사이메이 왕과 지토 왕이 모델은 아닌가 라는 설을 주장하고 있다.

진구왕후를 히미코, 이요와 같은 무녀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비슷한 시기에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조에 히미코가 17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기록과 위지 왜인전의 기록된 시기와 진구 왕후의 통치기간이 비슷하여 진구 왕후와 동일 인물 설이 있고, 또 일본서기 저자들이 실제 야마토 왕국을 건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오진 왕과 진구왕후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히미코의 재위 기간을 연결하기 위해 일부러 기록을 2갑자로 돌린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을 이용해 사실의 조작인 견해가 있다.

스미요시산진(住吉三神)와 함께 스미요시 대신의 한기둥으로서 또 오진 왕과 함께 야와타노카미(八幡神)의 한기둥으로서 신앙되게 된다. 오이타현의 우사신궁, 오사카부 오사카시의 스미요시 대사를 시작하여 후쿠오카현 후쿠츠시의 미야지다케 신사, 후쿠오카현 오카와시의 풍랑궁 등 몇 개의 신사의 제신이 되었다. 연고가 있는 후쿠오카시의 카시이궁이나 하코자키궁, 후쿠오카현 우미마치의 우미하치만신을 모신 신사, 이키시의 성모궁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 신공왕후가 삼한을 정벌하자 신라왕이 엎드려 항복하는 모습    

삼한 정벌설

<일본서기>에 의하면 오진 왕을 임신한 채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년) 신라왕은 일본군이 도착하자 스스로 결박하고 항복하였고 말과 마구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배에 돌을 대어 아이의 출산을 늦추었고 일본에 돌아가 치쿠시에서 오진 왕을 출산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사학계는 일본의 삼한 정벌설을 후세의 조작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의 많은 사학자들도 임나일본부설의 모태가 되는 <일본서기>에의 기술이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바, 조작된 사실로 인정하는 학자가 상당하다.

일본 제국 시대에는 일본은행권에 초상이 있었다.

▲ 일본은 국가 화폐에 신공왕후를 넣어 삼한정벌을 기정 사실로 조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