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사(三師)와 삼한(三韓) 제도 <삼권분립과 왕권분할>
한배달조선 시대에 임금 아래 입법, 행정, 사법의 삼권을 담당한 삼사(三師)는 지금의 민주정치 제도하에서 마찬가지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 제도와 일맥상통한다.
서기전7197년에 시작된 한국(桓國)에 이미 삼사(三師)제도가 존재하였다. 이는 서기전3897년경 한웅(桓雄)이 한국(桓國)에서 지위리 한인 천제로부터 천부삼인을 전수받아 삼사오가(三師五加)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으로 하강하여 개천하였다고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삼사제도는 권력분립의 기초이며, 삼사 아래 오가가 정립(定立)되어 각각의 업무에 충실하며 상호간의 권한을 간섭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배달나라 시대에 이미 행해졌던 삼륜구서(三倫九誓) 또는 삼륜구덕(三倫九德)이라는 윤리덕목의 구서 또는 구덕에는 명지우정사(明知于政事)라는 내용이 있는 바, 각자가 맡은 정사에 밝으며 다른 부서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도록 경계하였던 것이 된다.
삼한(三韓)이라는 제도는 단군조선 초기 단군왕검 천제(天帝)에 의하여 정립되었다. 서기전2333년 10월 3일에 조선(朝鮮)을 건국한 단군왕검은 곧바로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을 비왕(裨王)으로 봉하여 마한관경과 번한관경을 대신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태자부루(太子扶婁)를 진한(眞韓)으로 봉하여 섭정(攝政)케 하였는데, 진한관경(眞韓管境)을 맡아 다스린 것이 된다. 진한, 마한, 번한은 각각 그 아래 군후국을 두었으므로 천왕(天王)에 해당하고 이로써 단군왕검은 천제(天帝)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진한(眞韓)은 태자부루가 봉해져 진한관경 직할지 4주(州)와 구려(句麗), 진번(眞番), 부여(扶餘), 숙신(肅愼), 옥저(沃沮), 졸본(卒本), 비류(沸流), 예(濊), 몽고리(蒙古里), 낙랑(樂浪), 남선비(南鮮卑), 청해(靑海), 지백특(支伯特), 청아(菁莪), 서옥저(西沃沮), 맥성(貊城) 등의 군후국을 다스렸다. 이후 태자부루가 제2대 단제, 천왕이 되어 사실상 진한은 단군조선 삼한의 본 임금으로서 마한과 번한을 비왕으로 두어 진한관경을 직할로 하여 삼한(三韓)을 통할한 것이 된다. 진한(관경)의 수도는 송화강 아사달, 상춘의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의 순이다.
마한(馬韓)은 진한관경의 남쪽을 지키는 비왕으로서, 전기에는 웅씨(熊氏族), 후기에는 여씨(黎氏)가 봉해졌으며, 마한관경은 지금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구주(九州) 지역을 포함하며, 수도는 왕검성(王儉城)이 불리는 대동강 평양이다. 마한관경 내의 제후국으로는 개마(蓋馬), 협야(陜野)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소국들이 있었던 것이 되는데, 후삼한 시대에 보이는 마한 54개국과 진변 24개국 등의 땅이 그 제후국의 땅이 될 것이다.
번한(番韓)은 진한관경의 서쪽을 지키는 비왕으로서, 전기에는 치우천왕의 후손인 치씨(蚩氏), 후기에는 단군조선 종실인 한씨(桓氏)가 봉해졌으며, 번한관경은 지금의 발해만 유역과 산동지역을 포함하며, 수도는 소위 오덕지(五德地)로서 모두 왕검성이라 불리며, 동서남북중의 험독(險瀆), 한성(汗城), 낭야성(琅耶城), 구안덕향(舊安德鄕)이라 불리는 탕지(湯池), 안덕향(安德鄕)이라 불리는 개평(蓋平) 등 5경(京)을 두었다. 번한관경 내의 군후국으로는 청구(靑邱), 남국(藍國), 고죽(孤竹), 엄(淹), 래(萊), 개(介), 양(陽), 우(隅), 서(徐), 회(淮)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후기 단군조선 시대에 대산(大山)도 있었다.
이처럼 삼한의 한(韓)은 단군조선의 본 임금인 단제 또는 천제, 천왕의 비왕으로, 삼한관경을 나누어 다스린 점에서, 영토를 나누어 다스린 왕권의 분할, 즉 영토통치권의 분할에 해당한다. 이러한 영토 통치권은 단군조선의 기본 36주(州), 기본 28군후국(君侯國)의 지방자치제와도 직결된다. 물론 단군조선은 바깥 경계가 없으므로 한국, 배달 이래로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가 그 영역에 있었으며, 한국시대의 9족 64민과 12한국의 후예들의 나라가 모두 단군조선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이 된다.
단군조선의 삼한제도에서 특이한 것은 제2대 부루 단제 이후의 마한과 번한은 일반 왕국의 왕과는 달리 원칙적으로 군사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즉 단군왕검 천제는 영토는 분할하여 왕도로써 다스리게 하되 군사권은 함부로 부리지 못하게 명령을 받아 행하도록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 된다. 마한과 번한이 군사권을 가지는 온전한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말기 단군조선시대가 시작된 서기전425년부터인데, 이때 수도는 장당경(藏唐京)에 두었으며 국호를 대부여(大扶餘)라 하였고, 비왕인 마한과 번한은 각 마조선왕(馬朝鮮王), 번조선왕(番朝鮮王)으로 불렸다.
4. 오가(五加)와 화백(和白) 제도 <국정합의제>
오가제도는 삼사(三師)와 함께 이미 한국(桓國)시대에 존재하였다. 오가는 소위 오부(五部)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중의 오방(五方)의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고, 중앙정부의 다섯가지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部署)를 가리키기도 한다.
오가는 통상적으로 저가(豬加), 구가(狗加), 양가(羊加), 우가(牛加), 마가(馬加)인데, 윷놀이에서 도, 개, 글, 윷, 모에 각각 해당한다. 특히 윷놀이에서 도개글윷모의 점수는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바, 오행(五行)의 원리는 이미 배달나라 시대에 정립된 것으로 된다.
저가는 오방으로는 중앙에 해당하고 업무로는 질병치료와 관련되어 보건의료, 복지 등을 담당하는 부서에 해당하고, 구가는 오방으로 서방에 해당하고 업무로는 국내치안을 담당하여 경찰, 내무, 법무의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되고, 양가는 오방으로 북방에 해당하고 업무로는 교육, 사법(司法), 교정(矯正)을 담당하며, 우가는 오방으로 동방에 해당하고 업무로는 농사와 관련되며, 마가는 오방으로 남방에 해당하고 업무로는 국방, 외교, 명령, 기밀 등을 담당하는 부서에 해당한다.
도개글윷모에서 글은 통상적으로 양(羊)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나, 글이라는 소리로 보아 염소를 가리키는 궐이라는 글자가 변음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물론 양가는 교육담당이므로 글(文)과 직결된 관청이기도 하다. 한편, 양가를 계가(鷄加)라고도 하거나 도개글윷모의 글을 계가(鷄加)로 풀이하는 경우가 있는데, 닭을 가리키는 계(鷄)라는 글자가 글이라고 읽는 契(계)와 연관된 것으로도 보인다.
오가는 입법, 행정, 사법을 관장하는 삼사(三師)에 각각 담당업무별로 소속되어 맡은 일을 처리하는데, 지금의 국회나 국무회의처럼 회의를 열고서 중요한 국정을 토의하고 결정하였던 것이 된다. 이를 소위 화백제도(和白制度)라 하는데, 만장일치제로 기록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화백제도는 한국시대 이전의 마고(麻姑)시대에 이미 존재하였다. 즉, 서기전70378년에 시작된 마고시대에 43,200년간의 중천(中天)시대를 지나 서기전27178년경 후천(後天)시대가 막 시작되면서 마고의 손자로 기록되는 황궁(黃穹), 청궁(靑穹), 백소(白巢), 흑소(黑巢)의 4 형제 씨족(氏族)이 화백으로써 의사결정을 하여 마고성을 다스렸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황궁씨는 북보(北堡), 청궁씨는 동보(東堡), 백소씨는 서보(西堡), 흑소씨는 남보(南堡)를 맡아 마고성을 지키며 중앙에는 천부단(天符壇)이라는 제천단(祭天壇)을 두어 마고 삼신(三神)을 대리하여 나라일을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마고성 시대의 4보(四堡)제도는 단군조선 시대에 태백산(백두산)의 제천단과 진한, 마한, 번한의 삼한 및 동쪽의 예(濊)를 사보(四堡)로 한 1천부단 4보 체제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1천부단 4보제도는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또한 그대로 본 따 시행하였다.
이처럼 화백제도는 국정합의제(國政合議制)에 해당한다. 지금의 의회제도는 다수결 원칙으로 처리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국정을 회의로써 처리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화백제도는 그만큼 신중을 기하여 처리하는 회의제, 합의제임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 시대에는 화백회의의 결과를 공개하기도 하여 사후에 백성들의 의사를 수용하려는 절차를 취하기도 하였다.
개성을 중요시 하고 개인주의가 성행하며 다양한 문화와 철학이 존재하는 현시대에 만장일치제는 통과되기 거의 불가능한 제도가 될 것이다. 그나마 다수결의 원칙이 현대 민주주의 제도에 활용됨으로써 민의를 수용하거나 국정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자칫 다수결 원칙은 정당이라는 권력집단에 의하여 다수당 독재로 흘러갈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바, 정당의 이익과 일반 국민의 이익을 구분하여 판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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