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씨는 계속하여 당요(唐堯)가 변란(變亂)을 일으켰던 역법제도(曆法制度)에 관하여 우(禹)에게 유시하였다.
3. 역제반란(曆制反亂)의 죄(罪)
“또 그 역제(曆制)는 천수(天數)의 근본을 살피지 아니하고, 거북이나 명협(蓂莢)의 미물(微物)에서 근본을 취하였으니, 요(堯)는 또 무슨 속셈인 것인가! 천지 만물이 모두 수(數)에서 나와 각 수(數)의 상징함이 있는데, 하필이면 거북과 명협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물(物)과 일(事)에 각 그 역(曆)이 있으니, 역(曆)이라는 것은 역사(歷史)이다. 그러므로 요(堯)의 역제는 곧 거북과 명협의 역이며 인간세계의 역이 아니니, 인간세계에 합치(合致)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이런 가닭으로 삼정(三正)을 번복(飜覆)하여 구차하게 맞추려고 하나 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천화(天禍)에 이르게 되었다.
역(曆)이란 인생증리(人生證理)의 기본인 까닭으로 그 수(數)는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아니한 것이 없다. 이러하므로, 역(曆)이 바르면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일(事)이 증명(證明)되고 합치(合致)하여 복(福)이 되고, 역(曆)이 바르지 아니하면 천수(天數)에 어긋남이 있어 화(禍)가 되니, 이는 복(福)은 이치가 존재하는 데 있고, 이치는 바른 증명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역(曆)의 바름과 바르지 아니함은 인생화복(人生禍福)의 실마리이니, 가히 삼가지 아니할 것인가! 옛 시대 오미(五味)의 재앙이 한 사람의 미혹됨에서 나와 만대의 살아있는 혼령들에게 미치고 있는데, 이제 또 역(曆)의 재앙이 장차 천세(千世)의 진리(眞理)에 미치고자 하니 두렵도다!
천도(天道)가 돌고 돌아 저절로 끝(終)과 처음(始)이 있고, 종시(終始)가 또 돌아 4단(段)씩 겹쳐 나아가 다시 종시(終始)가 있다. 1 종시의 사이를 소력(小曆)이라 하고, 종시의 종시는 중력(中曆)이라 하고, 네 번 겹친 종시를 대력(大曆)이라 한다. 소력의 1회(回)를 사(祀)라 하고 사에는 13기(期)가 있으며, 1기(期)에는 28일(日)이 있고 다시 나누어 4요(曜)가 된다. 1요(曜)에는 7일(日)이 있으며, 요(曜)의 끝(終)을 복(服)이라 하는 까닭으로, 1사(祀)에는 52요복(曜服)이 있으니, 364일(日)이다. 이는 1, 4, 7의 성수(性數)이다.
매번 사(祀)의 처음에 대사(大祀)의 단(旦)이 있는데, 이 단(旦)이라는 것은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합하여 365일이 되며, 3사(祀)의 반(半)에 대삭(大朔)의 판(昄)이 있는데, 이 판(昄)이라는 것은 사(祀)의 절반이다. 이는 2, 5, 8의 법수(法數)이다.
판(昄)의 긴 것이 1일(日)과 같은 까닭으로 제 4의 사(祀)는 366일이 된다. 10사(祀)의 반(半)에 대회(大晦)의 구(咎)가 있고, 구(咎)라는 것은 시간(時間)의 뿌리이다. 300구(咎)가 1묘(眇)가 되는데, 묘(眇)라는 것은 구(咎)가 눈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9633의 묘(眇), 각(刻), 분(分), 시(時)를 지나 1일이 되니, 이는 3, 6 ,9의 체수이다. 이와 같이, 끝(終)나고 시작(始)하여 다시 중력(中曆)과 대력(大曆)에 미치어 이수(理數)가 이루어진다.
대저 이러한 요(堯)의 세가지 잘못은 허위(虛爲)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가히 부도(符都)의 실위(實爲)의 도(道)에 비할 수 있겠는가!“
유호씨(有戶氏)는 이와 같이 반역자 우(禹)에게 단단히 타이르며, 모든 법(法)을 폐지하고 부도(符都)로 돌아올 것을 권하였으나, 우(禹)가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위협이며 모욕이라 하고 무리를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하였다가, 수차례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서기전2199년 모산(茅山)의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이에, 하(夏)나라 무리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죽고자 하는 수만이었다. 이들은 모두 우(禹)가 치수할 때의 무리였다. 우(禹)의 아들 계(啓)가 서기전2198년에 왕이 된 후 이들 대군(大軍)을 이끌고 유호씨의 읍(邑)을 진격하니, 유호씨의 군사는 불과 수천이었다. 그러나, 하나라 군사는 전쟁마다 반드시 패하니 한번도 승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계가 드디어 두려워 하여 퇴진하고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아니하니, 그 무리들이 격앙되었다. 이에 서기전2195년경 유호씨는 하나라 무리들이 눈이 멀어 조속히 고쳐지기는 불가능함을 보고서, 장차 서남(西南)의 제족(諸族)들을 가르치고자 그 무리를 이끌고 가니 그 읍(邑)이 자연히 없어졌다.
이상으로, 유호씨는 반역자 우(禹)에게, 서기전2357년경 당요(唐堯)가 저질렀던 3가지 잘못을 일러주며, 요의 전철을 밟지 말고 반역을 포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가르침을 받기를 권유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우(禹)는 거부하고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의 역사상 반역자로 낙인 찍혔던 것이다. 우의 아들 계(啓)도 또한 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욕심에 눈이 멀어 항거함으로써, 단군조선으로부터 내버려진 참칭왕국(僭稱王國)으로서 고대중국의 역사상 최초의 왕조(王朝)가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夏)나라 후대의 왕들 중 단군조선에 호의적인 왕들도 있어 묵시적인 천자국(天子國)으로 존속하였던 것이며, 하나라가 도(道)를 잃을 때면 하나라 주변에 있던 소위 구이(九夷)로 기록되는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이 하(夏)나라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하나라의 정사(政事)에도 직접 깊숙이 간섭하여 통제하는 등 내정간섭을 계속하였던 것이 된다.
서기전1813년경 하나라 말기에 걸왕(桀王)이 군사를 일으킨 은탕(殷湯)을 토벌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에 군사적 구원을 요청하여 구원을 받기도 하였으나, 서기전1767년 결국 하나라가 조약을 위반함으로써 단군조선의 후원을 얻은 은탕의 군사가 하나라를 멸하여 소위 동이족의 은왕조(殷王朝)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유호씨가 하(夏)나라를 내놓은 자식처럼 포기하고서, 가르침을 펴러갔던 서남(西南) 지역은 마고대성(麻姑大城)이 있었던 파미르고원에서 볼 때 서쪽의 소위 수메르지역과 남쪽의 인도지역이 된다. 서방지역을 달이 지는 땅이라 하여 월식주(月息洲)라 하고, 남방지역을 별이 생기는 성생주(星生洲)라 한다.
유호씨가 이들 월식생성(月息星生)의 땅에 찾아가니, 백소씨(白巢氏)와 흑소씨(黑巢氏)가 살던 곳으로서, 그들의 후예가 오히려 소(巢)를 만드는 풍속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고탑과 층대를 많이 지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소(巢)는 글자 모양대로 높은 탑모양의 망루(望樓)를 가리킨다.
서기전2190년경 유호씨가 방문하였을 때 수메르지역과 인도지역에서 고탑과 층대를 많이 지었으나, 그 유래를 알지 못하고 도(道)가 와전되어 이도(異道)가 되고,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며 싸우고 정벌하는 등 천부(天符)의 본음(本音)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즉 마고(麻姑) 시대의 낙원의 역사는 거의가 기괴하게 되어 허망하게도 형적이 아주 없어진 것이었다. 다행히도 유호씨는 송구스럽게 맞이하는 전고자(典古者)의 영접을 받으면서, 마고(麻姑)의 도(道)와 천부(天符)의 본래(本來)의 이치(理致)를 일러주어 전(傳)하게 하였다.
유호씨의 후손은 단군조선에서 교부(敎部)의 직을 맡았다. 교부는 교육담당으로서 사도(司徒)에 해당하는데, 단군조선의 오가(五加) 중 양가(羊加)가 선악(善惡)을 담당하였는 바, 이 양가의 직속기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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