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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홍익인간 7만년의 역사

[홍익인간 7만년 역사 -31] 배달나라 연대기 역사 2


배달나라 7대 거련(居連) 한웅(桓雄) 때인 서기전3252년에 웅족 출신이자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인 소전씨(少典氏)를 강수(姜水)에 봉하여 감병(監兵)을 관장하게 하였다. 강수는 태백산(太白山) 부근에 흐르는 황하(黃河)의 지류가 되며, 소전씨가 봉해진 나라는 이 강수지역으로서 동서남북중 방향으로 볼 때 서방에 해당한다.

-신시(神市) 시대에서 청구(靑邱) 시대로-

서기전3218년에 소전씨의 아들인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가 배달나라의 우가(牛加)를 지낸 후, 산동지역의 태호복희의 나라를 접수하여 염제국(炎帝國)을 열었다. 공손씨는 소전씨의 별파(別派)가 된다. 염제(炎帝)는 남쪽의 임금이라는 뜻이 되고, 진제(震帝)는 하우낙서(夏禹洛書)와 주문왕팔괘도(周文王八卦圖)에 의하면 동쪽의 임금이 된다.

서기전3000년경 배달나라 갈고(葛古) 한웅(桓雄)이 염제신농국과 경계를 정하였다. 이는 제후국인 염제신농국의 관할 범위를 정한 것으로 자치를 인정해 준 것이다.

소전씨가 봉해진 유웅국(有熊國)은 서기전2770년경 소전씨의 후손인 공손씨(公孫氏)가 이었으며, 서기전2698년 계해년에 다시 공손씨의 아들 또는 후손인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이었다.

서기전2706년에 치우천왕이 43세의 나이에 배달나라 14대 한웅으로 즉위하였다. 치우라는 말은 우뢰와 비가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며, 지금의 말로 남아 있는 “치우다”라는 말의 “치우”가 된다. 즉 천지개벽을 뜻하는 말이다.

치우천왕은 호족(虎族)의 무리를 따로 황하 상류지역이 되는 하삭(河朔)에 옮겨 살게 하고, 땅을 개간하였으며, 갈로산(葛盧山)에서 광석을 캐어 구리와 주석과 쇠를 주조하여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大弓), 호시(楛矢)를 만들고, 또 오구장(五丘杖), 도극(刀戟), 태노(太弩), 예과(芮戈), 옹호극(壅狐戟),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 등의 병기도 만들고, 군대를 조련하였으며, 산업을 일으켰다.

치우천왕은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며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하고서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다.

서기전2700년경 염제신농국이 쇠퇴하자 여러 제후들이 다투어 욕심을 내자 치우천왕은 태백산에 있던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어 1년 동안 9제후국을 평정하고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고, 회대(淮岱) 사이의 산동지역을 개척하였다. 이를 청구(靑邱)라 하며 치우천왕의 배달나라 시대를 청구시대라 하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다른 제후들보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 양수(洋水)를 건너 염제국의 수도인 공상(空桑: 陳留)에 이르러 서기전2697년 갑자년에 선봉장이던 소호(少昊)를 항복시키고, 염제신농국을 평정하여 5대 유망(楡罔)을 폐하고서 유망의 아들 괴(魁)를 왕으로 봉하였다.

이 염제신농의 후예국이 단웅국(檀熊國)이라 불린다. 이 단웅국의 5대 홍제(洪帝)의 섭정(攝政)이 곧 단군왕검이며 서기전2357년부터 서기전2333년까지 단군왕검이 홍제의 외손(外孫)으로서 다스린 것이 된다.

서기전2698년에 공손씨를 이어 유웅국의 왕이 된 헌원이 욕심이 생겨 염제신농국을 차지한 치우천왕에게 도전하였다. 유웅국은 소전씨로부터 이어져 온 나라인데, 그 백성들은 지소씨족(支巢氏族)과 황토인(黃土人)들로 이루어졌다.

지소씨족은 파미르고원에서 서기전7197년에 사방분거 하기 이전인 서기전8000년경에 먼저 동쪽으로 마고성(麻姑城)을 나가 사막지대에 정착한 선주민이다. 또 황토인은 서기전3400년경 여와(女媧)가 혼인법을 제정하여 불어나게 한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이 된다.

서기전2700년경 당시 치우천왕의 군사들은 동철기(銅鐵器)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헌원의 유웅국 군사들은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기록된다. 헌원이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왕에게 도전하기를 10년 사이에 73회나 되며 합100여회가 된다. 그러나, 헌원은 연전연패함으로써 급기야는 전쟁중에 방향을 잃지 않고 도주하기 위하여 지남거(指南車)를 만들기도 하였다.

치우천왕은 81개 편대(編隊)를 조직하여 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