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웅(桓雄)은 서기전3923년 무술년(戊戌年)에 한국(桓國) 7대 지위리(智爲利) 한인(桓因)의 여러 아들 중 하나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천왕랑(天王郞)이 되어 천웅도(天雄道)를 닦았다.
한웅은 천왕랑이 되어 심신수련을 하던 중 호족과 웅족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들의 전쟁을 진압할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다.
서기전3900년경 한웅은 서자부(庶子部) 대인(大人)으로 명을 받고서 직책을 수행하던 중, 서기전3898년경에 조정(朝廷)에 들라는 지위리 한인의 명을 받고 알현하였다. 이에 지위리 한인은 삼사오가(三師五加)들과 의논한 결과를 알려 주며 태백산(太白山)으로 가서 시끄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홍익인간(弘益人間) 하라 명을 내렸던 것이다.
지위리 한인으로부터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수받은 한웅은 서기전3897년 갑자년에 삼사오가(三師五加)와 천왕랑(天王郞)의 무리 3,000을 이끌고서 한국(桓國)의 서자부(庶子部)를 떠나 약1만리 길을 따라 서남쪽으로 향하였다.
흑수백산(黑水白山)의 땅인 한국(桓國)의 중앙에서 출발하여 서남쪽 지방이 되는 황하 중상류 지역의 태백산(太白山)에 도착한 한웅은, 태백산 산정에 제천단(祭天壇)을 축조하고 태백산 아래 터를 닦아 마을을 만들어 수도로 정하였다. 이 마을을 신시(神市)라 한다.
신시는 신(神)들의 도시라는 뜻으로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신(神)같은 사람들이 터 잡은 곳이라는 말이 된다. 신시를 검벌이라고도 한다. 신(神)은 검이며 시(市)는 불로도 읽히는 글자로서 벌(판), 부여라는 말이 된다.
당시 한웅은 태백산에 다다르면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호족과 웅족 사이의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파악 해 두었다.
서기전3897년 갑자년 10월(亥月) 3일에 한웅은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지니고 태백산 제천단에 올라 하늘의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리고, 동북쪽의 한국(桓國) 조정(朝廷)을 향하여 명(命)을 성실히 수행할 것임을 고(告)하였다.
한웅이 하늘나라인 한국(桓國)의 조정(朝廷)에서 명을 받고 땅나라인 지방으로 내려오니 이를 개천(開天)이라 한다. 개천이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옴을 말한다. 즉, 하늘나라의 뜻을 땅나라에 실현하기 위하여 하강(下降)한 것을 이른다.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는 뜻이 된다. 이는 결국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전수받아 홍익인간(弘益人間)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
이로써 한웅(桓雄)은 한인(桓因)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명(命)을 받은 천왕(天王)이 되어 태백(太白)의 땅을 홍익인간할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태백은 크게 밝다라는 의미이므로, 태백산을 중심으로 한 나라를 밝달나라, 발달나라라 불렀다. 밝달나라는 단국(檀國)이라고도 하며, 단(檀)이라는 글자가 박달이라는 말이므로 박달나라가 되고, 발달의 “발”은 받침 “ㄹ”이 변음되어 “바이”가 되어 “바이달”, “배달”로 불리기도 한다. “밝”을 표기한 백(白)의 소리가 “바이”로서 “배”로 변음된 것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한웅은 배달나라의 시조가 되었는 바, 한웅천왕(桓雄天王), 한웅천황(桓雄天皇)이라고 하며 “크게 밝은 한(桓)“이라 하여 거발한(居發桓)이라고 한다. 한웅(桓雄)이라는 글자는 천웅(天雄)이라는 뜻도 되며, 대웅(大雄), 천사(天師), 대사(大師)의 뜻도 된다.
서기전3897년 10월 3일 이후 한웅천황은 홍익인간 세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웅족과 호족의 정세를 모두 파악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먼저, 웅족과 호족의 무리들에게 진정한 인간으로 되돌아 오도록 하기 위하여 기회를 주기로 하였다.
한웅천왕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 참전계경(參佺戒經)의 가르침 중에서 먼저 참전계경의 가르침을 주어 진정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였다.
웅족의 왕과 호족의 왕을 불러 피를 맑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신령스런 쑥 한다발과 마늘 20개를 나누어 주면서, 백일 동안 햇빛이 있는 밖으로 나오지 말고 인간의 본성을 깨달으라 하며, 우선 삼칠일 즉 21일간 마음을 닦게 하였다.
웅족의 왕은 여추장으로 웅녀(熊女)라 불린다. 웅녀는 한웅천왕의 가르침을 따라 굴속에서 21일간을 정성으로 마음을 닦았다. 그러나, 호족의 왕은 마음을 고요히 하며 인간본성을 깨달으라는 가르침을 금방 잊어버리고 참을성이 없어 결국 마음을 잡지 못하여 굴 밖으로 나와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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