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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태종의 건강학 ② 태종은 드라마 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드라마 에서 정도전의 맞상대로 맹활약 중이다. 에서 태종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유동근 씨가 에서는 태조 이성계 역할을, 그리고 당시 세종 이도 역할을 맡았던 안재모 씨가 이번에는 태종 이방원을 맡았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권력 쟁취 과정에서 골육 간에 벌였던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했다. 하지만 태종이 진짜 '용의 눈물'을 보였던 때는 바로 자신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였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 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태종은 막내의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각각 상을 후하게 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기쁨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 더보기
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태종의 건강학 ① 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태종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우리는 태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기골이 장대한 후덕한 인상을 떠올린다. 아마도 드라마 에서 태종 역할을 한 탤런트 유동근이나, 최근 에 나온 안재모의 이미지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의사를 조롱한 똑똑한 왕 하지만 사실 태종은 기골이 장대한 건강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을 하나 살펴보자. 태조 3년 6월 1일, 앞으로 태종이 될 정안군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의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자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놓고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 여.. 더보기
‘댓글 충동’ 내 마음부터 살펴보자 ‘댓글 충동’ 내 마음부터 살펴보자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이 이는 순간. 바로 자신을 돌아볼 절호의 기회다. 인터넷이든 신문기사든 내 콤플렉스가 건드려져 외부로 투사된 결과물이 바로 ‘댓글’이기 때문이다. 댓글은 때론 합리적 주장과 사회참여로 포장된다. 하지만 그 이면의 동력은 콤플렉스다. 평소 무의식 지하창고에서 꿈틀거리다 취중진담처럼 올라온다. 과연 우리를 열폭하게 만드는 실체가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일까. 아니면,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폭발 직전의 콤플렉스가 그들을 건수로 잡은 것일까. 왜 특정 내용을 접하면 그냥 넘기지 못하고 댓글을 달고 싶을까.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댓글도 오만가지 세상사 중에서 정확히 내 콤플렉스와 마주칠 때의 결과물이다. 댓글은 외부로 ‘투사’하고픈 충동과 상통한다... 더보기
서울 거지들이 갑자기 사라진 엽기적인 사연은? 서울 거지들이 갑자기 사라진 엽기적인 사연은? 명종의 건강학 ③ 심약한 왕에 나라는 엉망이 되고… 한의학에선 목소리와 정력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 명종 3년 11월 7일 시강관 정유길이 왕의 목소리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옥음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신하들의 불안한 예측은 후일 맞아 떨어진다. 명종은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그 세자가 13세에 죽자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명종 18년 9월 20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이듬해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 더보기
인종 떡 독살설의 진실은… 인종 떡 독살설의 진실은… 명종의 건강학 ② 인종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인물은… 인종의 재위 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1월 1일부터 약방 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왕에게 건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신하들은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이런 신하들의 요청에 이렇게 반문했다. 실록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할 만하다.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왕의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 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 더보기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명종의 건강학 ① 문정왕후 윤 씨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1515~1545년, 재위 1544~1545년)과 제13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의 어머니로,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은 중종과 그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 신 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겪은 불행이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신 씨가 구중궁궐에서 중종이 혹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바위에 치마를 걸치고 궁궐을 바라봤다는 애달픈 한이 서린 장소다. 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더보기
대통령 외국어 연설은 ‘태음인’식 소통 대통령 외국어 연설은 ‘태음인’식 소통 분명 똑같은 걸 함께 보고도 동상이몽을 한다.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타고난 성정의 치우침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상대만 고치려 들게 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해당 국가의 언어로 연설한 것에 대한 논란도 그런 예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선 영어로, 중국에선 중국어로, 프랑스에선 불어로 연설을 했다. 이를 두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공식 언어는 우리말”이라며 “해외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당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5개 국어 구사능력에 대해 “좋은 시계 찼다고 자꾸 보여주면 촌스럽지 않으냐”며 힐난했다. 태음인과 소음인의 시각차다. 태음인은 ‘예(禮)’를 타고나 .. 더보기
수양의 야심, 거머리가 막을 수 있었다면! 수양의 야심, 거머리가 막을 수 있었다면! 문종의 건강학 ③ 문종 1년 8월 8일엔 다시 허리 밑에 작은 종기가 생긴다. 11월 14일과 15일엔 종기가 난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면서 두통까지 호소한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게 거머리 요법이다. 문종은 11월 16일 "어제 아침에는 차도가 있더니, 어제 저녁에는 쑤시고 아파서 밤에 수질(거머리)을 붙였다. 붙인 뒤에는 약간의 가려움은 있으나 어제 저녁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후 종기가 많이 회복되면서 정무를 재개하는 효험을 본다. 거머리를 이용하는 치료 방법을 에선 기침법이라고 한다. "종기가 생겨서 점차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조각을 헌 데에 붙이면 먼저 마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종기의 꼭대기다. 그곳을 먼저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짠 기운이.. 더보기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문종의 건강학 ②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 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 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 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더보기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문종의 건강학 ①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 재위 1450∼1452년)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 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를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 즉, '해가 없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