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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낮은 한의학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태종의 건강학 ②

태종은 드라마 <용의 눈물>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의 맞상대로 맹활약 중이다.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유동근 씨가 <정도전>에서는 태조 이성계 역할을, 그리고 당시 세종 이도 역할을 맡았던 안재모 씨가 이번에는 태종 이방원을 맡았다.

<용의 눈물> 드라마의 제작진은 권력 쟁취 과정에서 골육 간에 벌였던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했다. 하지만 태종이 진짜 '용의 눈물'을 보였던 때는 바로 자신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였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 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태종은 막내의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각각 상을 후하게 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기쁨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기쁘다."

태종 18년 성녕대군은 갑자기 전염병인 완두창에 걸려 위독해졌다. 우리는 성녕대군의 전염병 치료를 둘러싼 대응을 통해서 조선 초기 의료의 실상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전염병은 무당과 의사의 치료가 공존하는 영향이었다. 완두창의 예후를 알아보는 방법은 의사가 아니라 무당, 점쟁이 등 무속인이 주도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의학(醫學)의 한자인 '醫'의 의미는 본래 받침인 '酉'가 아니라 '巫'로부터 시작된다. 의학의 기원을 무속으로 본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도 이런 견해를 반영한다. <여씨춘추> '진수편'을 한 번 살펴보면, 한(漢) 무제가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내고 나서 병이 나았다.

의학에 밝았던 태종도 다를 바가 없었다. 태종은 승정원에 명하여 점을 잘 치는 사람을 모아 병의 예후를 알아보았는데 점치는 무속인은 점을 보고 모두 '길하다'라고 예측하였다. 이후에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도)도 여기서 등장한다. 정탁을 시켜 주역 점을 쳐서 임금에게 올리자, 충녕대군이 나와서 이 점을 풀이해 모두가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쟁이의 예측과 무관하게 성녕대군은 죽고 말았다. 태종은 아끼던 막내의 죽음에 상심이 대단히 컸던 모양이다. 심지어 태종은 아들이 놀던 곳을 지켜보기 힘들어 개성 유후사로 거처하는 곳을 옮기려고 했다("내가 옮겨 거동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애통하고 맺힌 정을 씻으려는 것이다."). 또 곡기를 끊고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군이 병을 얻은 날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 유명(幽明)의 길이 막혀 있으니 비록 수라를 들려 해도 얼굴 모습이 선하여 잊지 못한다."

태종의 아들 사랑은 성녕대군을 치료했던 의원들의 죄를 묻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태종은 우선 경안공주의 갑작스런 죽음부터 언급한다.

"을미년에 경안 궁주(慶安宮主)의 병의 증세가 열이 나고 괴로움이 심하여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니, 양홍달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병의 증세는 의가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고 하고, 양위탕과 평위산을 바쳤다. (…) 졸(卒)한 뒤에 내가 방서를 보니, 눈을 바로 뜨고 손이 뒤틀리는 것은 바로 발열하는 증세였다.

성녕군의 창진(瘡疹)이 발하던 처음에 (그는) 허리와 등의 고통을 호소했다. (이를 놓고서) 조청과 원학 등이 풍증(風證)이라고 아뢰어서 인삼순기산을 바쳐 (왕자가) 땀을 흘리게 하였다. 뒤에 (내가) 의서의 두진문(豆疹門)을 (직접 읽어) 보니, 허리와 등의 아픈 것은 완두창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또 병이 위독하던 날에 이미 증세가 변하게 되어 안색이 변했는데, 박거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순조로운 증세입니다. 안색이 황랍색(黃蠟色)이 되면 최상의 증세입니다'고 하였다. 이 어의들이 비록 (왕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마음을 쓰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문제가 된 인삼순기산은 풍을 치료하는 약이다. 오한이 나며 뒷머리와 목이 뻣뻣하고 아플 때 허약한 사람에게 구사하는 처방이다. 땀을 내는 마황과 기를 고르게 하는 진피 천궁 백지 백출 후박 길경 감초 갈근 인삼이 들어 있다. 이런 인삼순기산은 한의학의 논리를 염두에 둬도 명백한 오류였다.

한의학에서는 전염병의 원인을 음액이 마르면서 건조해진 틈에 외부에서 무엇(바이러스나 세균)인가가 침투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전염병에 몸에서 땀이 나게 하는 마황을 처방해 몸을 더 건조하게 하는 것(면역력을 더 약하게 하는 것)은 완주창의 치료와는 거리가 먼 약제였다.

성녕대군이 죽음이 낳은 후폭풍은 무속인이 주도하는 전염병 대응까지 미쳤다. 태종은 성녕대군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판수, 무녀를 모두 내쳤을 뿐만 아니라 밀교 방식의 둔갑술로 질병을 치료하는 초지종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모두 다 끊었다. 이 때 확고해진 태종의 신념은 죽음 앞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세상을 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 신선과 부처와 같은 것은 없다."

무당으로부터 벗어나 병의 원인을 따지는 치료 방식을 적용한 최초의 명의는 유명한 편작이다. 그는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자의 병은 낫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삶과 병의 원리를 음양 이론에 맞춰서 설명했다. 이렇게 편작이 도입한 이성적인 의료 방식을 조선에 자리 잡게 한 최초의 군주가 바로 태종이었다.

이런 태종의 옆에는 그의 어의 평원해가 있었다. 그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일본의 중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어의로서 태종을 오랫동안 진료하였다. 불교와 중을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태종이 중이었던 평원해를 옆에 둔 것도 흥미로운데, 그에 대한 평가는 더욱더 흥미롭다.

"네(평원해)가 의(義)를 사모하여 귀순해 와서, 내가 잠저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증상을 진찰하고 약을 조제하되, 날로 더욱 근신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또 나라 사람이 병이 있으면 즉시 의료하여 자못 효험이 있었으니, 공로가 상을 줄 만하다."

이런 태종은 어떤 질병으로 세상을 떴을까? 실록은 여기에 대해 한 마디도 설명이 없다. 세종의 하교를 보면 태종의 병환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전한다. 세종 4년 4월 22일 태종은 아들(세종)과 동교에 나가 매 사냥을 구경하고 와서 갑작스럽게 몸이 불편하면서 위중해졌다.

세종 편에서 밝혔듯이, 세종은 누구보다도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명민한 왕이었지만 무속과 불교에 심취했었다. 태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다시 한 번 토속 신앙인 성요법(星曜法)으로 길흉을 점쳤다. 그러나 자신의 능을 만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태종의 신념은 확고했다. 비록 정도전의 목을 친 태종이지만, 그 역시 유학자였던 것이다.

"이 능은 내가 들어갈 데인데 더러운 중들을 가까이 오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