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醫學/낮은 한의학

왕의 비명 "죽은 며느리 탓에 귀에서 홍수가 났다" 왕의 비명 "죽은 며느리 탓에 귀에서 홍수가 났다" 인조의 이명 ② 귀에서 큰물이 흐르는 고통을 너희가 아는가? 1646년(인조 24년),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바로 그 해 겨울부터 이명 증상이 시작되었다. 겨울의 초입인 음력 10월 17일, 인조는 이명 증상을 호소한다. 실록이 전하는 인조의 증상은 한의원을 찾는 수많은 이명 환자의 그것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인조의 하소연을 직접 들어보자. "전에부터 귓속에서 매미 소리가 났었다. 그런데 금월 13일, 왼쪽 귀에서 홀연 종치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흐르는 소리는 가는 소리가 아니라 큰물이 급하게 흐르는 소리다. 어제 아침에도 똑같은 소리가 났다. 침을 맞으면 좀 낫지 않겠는가?" 영의정 김자점을 비롯한 신하와 어의들은 먼저 귀 감기로 진.. 더보기
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왕, "귀가, 왼쪽 귀가…" 아들·며느리·손자까지 죽인 왕, "귀가, 왼쪽 귀가…" 인조의 이명 ① 소리는 마음을 움직인다. 아침의 새소리, 교회의 종소리, 사찰의 풍경소리는 걱정을 씻어내고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길 가다 혹은 차를 몰고 가다 우연히 들리는 음악에 순식간에 기분이 바뀌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들리는 소음만 제거해도 행복도가 높아진다는 연구까지 염두에 두면, 마음과 소리가 얼마나 밀접한지 알 수 있다. 흔히 '귀 울림'으로 알려진 이명 역시 마음과 밀접한 병이다. 귀의 울림은 곧 자신의 마음이 괴롭다는 신호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명 환자들이 한방과 양방의 온갖 병원을 숱하게 다니면서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의 괴로움이 여전하니 그 울림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1년 넘게 '.. 더보기
안동 김 씨의 '종마'로 키워진 강화도령 안동 김 씨의 '종마'로 키워진 강화도령 철종의 건강학 왕이 된 강화도령 정원용이 남긴 을 보면, 헌종이 죽고 이틀 후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부분이 이렇게 담담히 묘사된다.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사도세자는 한 명의 정실과 두 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5남 3녀를 낳았다. 적장자 정이 어린 나이에 죽자 둘째 산이 왕세손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되었다. 두 번째 후궁 순빈.. 더보기
녹용 수천 첩 복용하고도 23세 요절, 왜? 녹용 수천 첩 복용하고도 23세 요절, 왜? 헌종의 건강학 헌종(1827~1849년, 재위 1834~1849년)은 순조(1790~1834년, 재위 1800~1834년)의 아들 효명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와 효명세자는 외척의 발호, 홍경래의 난, 19세기 초의 대기근 등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왕권을 강화하면서 조선 생존의 불씨를 살리려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효명세자(1809~1830년)가 급서하고, 이미 평생 세도가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생하다 기력이 쇠한 할아버지 순조마저 승하하면서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조선 24대 왕으로 등극했다. 처음에는 순조의 왕비이자 할머니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지만, 헌종 7년(1841년) 3월 7일부터 자신이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 이미 나라꼴은 엉망이 된 .. 더보기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세조의 건강학 흔히 권력을 위해서 핏줄을 희생시킨 태종과 세조를 비슷한 부류로 묶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둘은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종은 한 때 자신의 혁명 동지였던 공신들, 그러니까 원경왕후와 처가, 가까운 형제 등을 왕권을 위해서 희생시켰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고자 자신의 주변을 희생시켰다. 반면에 세조는 자신의 혁명에 동참한 공신을 위해서 권력을 분배했다. 태종과 달리 세조는 자신의 사적 욕망을 최우선에 뒀다. 이렇게 자신의 끔찍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죄의식은 당연히 공포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태종이 피로 점철된 비극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았음에도 큰 정신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던 데 반해서, 세조는 왕.. 더보기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정도전의 목은 쳤지만, 이방원도 유학자였다 태종의 건강학 ② 태종은 드라마 로 대중에게 각인되었다. 최근에는 또 다른 드라마 에서 정도전의 맞상대로 맹활약 중이다. 에서 태종 역할을 맡았던 배우 유동근 씨가 에서는 태조 이성계 역할을, 그리고 당시 세종 이도 역할을 맡았던 안재모 씨가 이번에는 태종 이방원을 맡았다. 드라마의 제작진은 권력 쟁취 과정에서 골육 간에 벌였던 피눈물을 '용의 눈물'로 정의했다. 하지만 태종이 진짜 '용의 눈물'을 보였던 때는 바로 자신의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였다. 태종 12년 6월 23일 중궁인 원경왕후 민 씨는 막둥이 아들을 낳았다. 태종은 막내의 출산 후 내의원에 근무한 어의들에게 각각 상을 후하게 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기쁨도 숨김없이 표현했다. "내가 심히 .. 더보기
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태종의 건강학 ① 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태종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우리는 태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기골이 장대한 후덕한 인상을 떠올린다. 아마도 드라마 에서 태종 역할을 한 탤런트 유동근이나, 최근 에 나온 안재모의 이미지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의사를 조롱한 똑똑한 왕 하지만 사실 태종은 기골이 장대한 건강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을 하나 살펴보자. 태조 3년 6월 1일, 앞으로 태종이 될 정안군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의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자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놓고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 여.. 더보기
서울 거지들이 갑자기 사라진 엽기적인 사연은? 서울 거지들이 갑자기 사라진 엽기적인 사연은? 명종의 건강학 ③ 심약한 왕에 나라는 엉망이 되고… 한의학에선 목소리와 정력이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판단한다. 명종 3년 11월 7일 시강관 정유길이 왕의 목소리를 거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옥음을 들으니 여느 때만 못합니다." 신하들의 불안한 예측은 후일 맞아 떨어진다. 명종은 순회세자 하나를 낳았는데, 그 세자가 13세에 죽자 건강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명종 18년 9월 20일 순회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명종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이듬해 윤2월 24일 명종은 세자를 잃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한다. "나의 심기가 매우 편안하지 않으며 비위가 화하지 않고 가슴이 답답하며 갑갑하다. 한기와 열이 쉽게 일어나며 원기(元氣)가 허약하여 간간.. 더보기
인종 떡 독살설의 진실은… 인종 떡 독살설의 진실은… 명종의 건강학 ② 인종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인물은… 인종의 재위 기간은 8개월이다. 인종 1년 윤(閏)1월 1일부터 약방 제조와 의원들은 계속해 진찰을 받고 약을 쓸 것을 왕에게 건의하지만 거절당한다. 신하들은 세종의 경우처럼 고기반찬을 먹을 것을 종용한다. 하지만 인종은 1월 29일 이런 신하들의 요청에 이렇게 반문했다. 실록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기록할 만하다. "나도 아들인데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어디에다 나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느냐." 인종 1년 6월 25일 이질(설사) 증세가 시작되면서 왕의 증세가 급격하게 나빠진다. "상의 증세는 대개 더위에 상한 데다 정신을 써서 심열(心熱)하는 증세로 매우 지치셨는데, 약을 물리치는 것이 너무 심하여 광증을 일으키실 .. 더보기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명종의 건강학 ① 문정왕후 윤 씨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1515~1545년, 재위 1544~1545년)과 제13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의 어머니로,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은 중종과 그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 신 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겪은 불행이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신 씨가 구중궁궐에서 중종이 혹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바위에 치마를 걸치고 궁궐을 바라봤다는 애달픈 한이 서린 장소다. 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