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學/낮은 한의학 썸네일형 리스트형 수양의 야심, 거머리가 막을 수 있었다면! 수양의 야심, 거머리가 막을 수 있었다면! 문종의 건강학 ③ 문종 1년 8월 8일엔 다시 허리 밑에 작은 종기가 생긴다. 11월 14일과 15일엔 종기가 난 부위가 쑤시고 아프다면서 두통까지 호소한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게 거머리 요법이다. 문종은 11월 16일 "어제 아침에는 차도가 있더니, 어제 저녁에는 쑤시고 아파서 밤에 수질(거머리)을 붙였다. 붙인 뒤에는 약간의 가려움은 있으나 어제 저녁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후 종기가 많이 회복되면서 정무를 재개하는 효험을 본다. 거머리를 이용하는 치료 방법을 에선 기침법이라고 한다. "종기가 생겨서 점차 커질 때 물에 적신 종이 한 조각을 헌 데에 붙이면 먼저 마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종기의 꼭대기다. 그곳을 먼저 물로 깨끗하게 씻어서 짠 기운이.. 더보기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문종의 건강학 ②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 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 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 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더보기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문종의 건강학 ①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 재위 1450∼1452년)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 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를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 즉, '해가 없습니다.. 더보기 고종과 조선, 어쩌면 명성황후가 죽였다 고종과 조선, 어쩌면 명성황후가 죽였다 고종의 건강학 ③ 고종 독살설이 끊이지 않은 이유는 고종의 건강 상태 탓이다. 사실 고종은 큰 질병을 앓은 기록이 별로 없다. 연령별로 요약해보면 16세 되던 해에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머리털), 귀밑 부분에 종기가 나자 당귀고라는 고약을 붙여 나았다. 33세 때 겨울에 세자와 함께 잠깐 감기를 앓았고, 34세엔 중전과 함께 감기를 앓았다. 39세에도 여름 감기와 체증을 앓았는데, 이때부터 소화기 질환을 앓기 시작했다. 고종이 가장 많이 호소한 증상은 소화기 질환이었다. 47세에도 담체(담(痰)이 몰려 한곳에 뭉친 것. 또는 그로 인해 생긴 병) 증상을 앓는데, 담체란 소화기가 약해지면서 위장에 불순물이 생겨 쉽게 체증을 앓거나 두통, 어지러움을 느끼고 관.. 더보기 커피, 식혜…고종 독살설의 진실은? 커피, 식혜…고종 독살설의 진실은? 고종의 건강학 ② 식혜 독살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독살설에 휘말리면서 3·1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중요한 사건이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1시 15분경부터 증상이 시작돼 새벽 6시 30분 중태에 빠지는 과정에서 당시 고종을 가장 먼저 진찰하고 임종을 지킨 의사는 일본인 여의 도가와 기누코다. 당시 주치의였던 가미오카의 몸이 불편해지면서 대신 고종을 진찰한 여의다. 1월 23일자 는 도가와를 인터뷰하고 그의 술회를 게재했다. 고종은 발병하기 4, 5일 전부터 "다소 식욕이 없고 잠이 잘 오지 않네" 하고 몸 상태를 설명했는데, 발병 전 의자에 앉아 있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도가와는 발병 연락을 받은 후 허둥지둥 전의와 참궁을 했는데, 2회부터 7회까지 .. 더보기 대원군이 명성황후 아들을 죽였다? 대원군이 명성황후 아들을 죽였다? 고종의 건강학 ① 당뇨, 심장 질환 등을 통칭하던 '성인병(成人病)'이라는 명칭이 '생활 습관 병'으로 바뀌었다. 대한내과학회는 2003년 "이른바 성인병은 대부분 흡연, 과식, 과음, 운동 부족 등 잘못된 생활 습관의 반복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 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성인병'이라는 명칭을 '생활 습관 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실 당뇨, 심장 질환뿐만 아니라 질병의 대부분은 생활 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의 사실상 마지막 왕 고종이 바로 그 증인이다.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은 나름대로 건강한 체질이었다. 조선 말기 대다수 왕이 병과 싸우.. 더보기 시대의 색골 연산, 죽음 앞에서 찾았던 여인은? 시대의 색골 연산, 죽음 앞에서 찾았던 여인은? 정력에 좋다며 백마에 메뚜기까지 사실 연산군은 패륜적으로 성에 집착했던 것치곤 자식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왕후 신 씨에게서 2남 1녀, 후궁에게서 2남 1녀로 성종이 16남 12녀를 둔 것과 비교할 때 사뭇 왜소해 보이는 건 그의 찔끔거리는 소변 기능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로 양기가 모자랐던지 연산군 9년엔 양기를 보충하려고 백마를 골라 내수사로 보낼 것을 명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엽색적인 행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된 사람은 고려 시대의 신돈이다. 성현의 엔 신돈의 엽색 행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신돈의 권세가 커지자 사대부 중에 얼굴이 어여쁜 아내와 첩을 둔 자가 있으면 매번 허물을 씌워 감옥에 넣었다. 그러고는 만약 주부가 찾아와서 남편의 억울함.. 더보기 백모까지 넘본 색정광, 오줌 못 가린 사연은? 백모까지 넘본 색정광, 오줌 못 가린 사연은? 연산군이 특히 좋아했던 음식은 소의 태(胎)다. 농업 국가인 조선에선 소를 식용으로 도축하는 걸 엄격히 규제했다. 태조 이성계가 재위 7년 9월의 교지에서 "소와 말의 사사로운 도살을 엄금한다"고 한 것을 비롯해 곳곳에서 우유의 음용마저 제한했다. 더욱이 소 전염병으로 농우(農牛)가 줄면서 경작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왕들마저 반찬으로 쇠고기를 먹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연산군은 완전히 역주행한다. 실록 11년 4월 20일 잔치마다 쇠고기를 쓸 것을 전교한다. 실록의 기록이다. "이로부터 여느 때의 흥청을 공궤(음식을 줌)하는 데에도 다 쇠고기를 쓰니, 날마다 10여 마리를 잡아 수레로 실어 들였다. 노상에서 수레를 끌거나 물건을 실은 소까지도 다 빼앗아 잡으니.. 더보기 수박에 딴죽 걸다 능지처참…연산군은 왜? 수박에 딴죽 걸다 능지처참…연산군은 왜? 조선 왕들 중 부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거나 목격한 사람은 3명이다. 연산군, 경종, 정조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는 사약을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장희빈이 죽은 시점과 경종의 병력(病歷)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가 복용한 처방들은 간질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평생 화증(火症)에 시달려 인삼은 거의 입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스코틀랜드의 정신과 의사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광기를 이렇게 평했다. "광기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돌파구다." 조선 역사상 성군(聖君)의 길을 가장 극렬히 역주행한 광기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그를 바라보는 좌표는 바로 어머니다. 연산군을 '있어선 안.. 더보기 선릉 환락가 불야성의 비밀 선릉 환락가 불야성의 비밀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 배꼽 밑에 작은 덩어리가 생겨 지난밤부터 조금씩 아프고 빛깔도 조금 붉다고 얘기하면서 전에 유사한 증세를 앓았던 이세좌를 불러 질병 치료 경험을 듣는다. "신은 이 병을 앓은 지 15년이 지났는데 별다른 치료 방법은 없고 다만 무쇠와 천년 된 기와를 달궈 그 부위에 찜질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답변을 듣는다.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의관 송흠이 진후하고 나와서 말했다. "성상의 몸이 몹시 여위셨고, 맥도가 부삭하여 어제는 육지였는데, 오늘은 칠지였습니다. 그리고 얼굴빛이 위황하고 허리 밑에 적취(積聚)가 있고, 내쉬는 숨은 많고 들이쉬는 숨은 적으며, 입술이 또 건조하십니다. 성상께서 큰 소리로 약을 물으시.. 더보기 이전 1 2 3 4 5 ··· 1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