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세조의 건강학
흔히 권력을 위해서 핏줄을 희생시킨 태종과 세조를 비슷한 부류로 묶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둘은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종은 한 때 자신의 혁명 동지였던 공신들, 그러니까 원경왕후와 처가, 가까운 형제 등을 왕권을 위해서 희생시켰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고자 자신의 주변을 희생시켰다. 반면에 세조는 자신의 혁명에 동참한 공신을 위해서 권력을 분배했다. 태종과 달리 세조는 자신의 사적 욕망을 최우선에 뒀다.
이렇게 자신의 끔찍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죄의식은 당연히 공포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태종이 피로 점철된 비극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았음에도 큰 정신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던 데 반해서, 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평생 자신이 죽인 조카 단종과 다른 이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세조 3년 7월 27일, 의경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젊은 나이에 걸린 병이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그 해 9월 2일 세상을 등졌다. 이어서 둘째인 해양대군이 세자가 되고, 세자빈으로 한명회의 셋째 딸이 간택되었다. 세조 7년 11월 1일에는 불안하게도 세자빈이 병들었다. 결국 세자빈은 11월 30일 원자를 낳고 5일 만에 죽었다.
원자 또한 세조 9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나자, 세조는 공포에 휩싸였다. 계유정난(1953년) 과정에서 죽인 김종서, 황보인 등 대신 또 2년 후에 자신의 측근이 암살한 조카 단종 등 수많은 원혼들이 마음의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당대의 호사가는 이런 점을 확대 해석해 야사로 윤색했다.
단종의 생모였던 현덕왕후가 꿈속에서 침을 뱉어 세조의 피부병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 혹은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실제로 실록은 유사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세조 3년 9월 7일 기록을 보면, 현덕왕후의 묘소에서 일부 훼손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실렸다.
"현덕 왕후(顯德王后) 권 씨의 신주(神主)와 의물(儀物)을 일찍이 이미 철거하였으니, 그 고명(誥命)과 책보와 아울러 장신구를 해당 관사로 하여금 수장(收藏)하게 하소서."
절 짓는 왕을 질타한 신하는…
세조는 평소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 그러나 세조 9년 9월 27일 효령대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방장한 혈기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 않으니, 일찍이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이를 다스렸다."
세조의 온천 예찬은 계속된다. 세조 10년 4월 16일 기록이다.
"내(세조)가 지금 온천욕을 시험하니, 그 효력이 신통한 것 같아서 풍습(風濕)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출입(出入)할 즈음에 감풍(感風)이 많아서 예전의 병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뒤의 병(病)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지나치면 어지럽고 정도에 미치지 못하면 효험이 없으니 (…) 이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세조의 병은 실제로 야사에서 전하는 피부병이었을까? 한의학에서 피부 질환은 보통 "습열"로 표현한다. 세조가 직접 언급한 "풍습의 병"은 대부분 관절 질환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니 당시 세조는 온천욕으로 관절 질환이 유발하는 신경통을 치료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의 질병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세조 12년 10월 2일의 기록이다.
"임금이 한계희(韓繼禧), 임원준(任元濬), 김상진(金尙珍)을 불러서 말하기를, 꿈속에 나는 생각하기를, 현호색(玄胡索)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여겨서 이를 먹었더니 과연 가슴과 배의 아픈 증세가 조금 덜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약인가? 이에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七氣湯)을 올렸더니 과연 병환이 나았다."
<동의보감>은 칠기탕의 칠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칠기란 기뻐하고 성내고 생각하고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 칠기가 서로 어울려서 뭉친 것이 솜이나 엷은 막 같기도 하고 심하면 매화 씨 같다. 이러한 것이 목구멍을 막아서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으며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는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기가 치밀어서 숨이 몹시 차게 된다. 심해지면 덩어리가 되어서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통증이 발작하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이럴 때 칠기탕을 쓴다."
세조가 의사를 여덟 종류로 분류하고, 그 중 첫 번째로 마음을 고치는 심의를 꼽은 것도 흥미롭다. 세조 9년의 기록이다.
"심의(心醫)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도록 가르쳐서 병자(病者)가 그 마음을 움직이지 말게 하여 위태할 때에도 진실로 큰 해(害)가 없게 하고, 반드시 그 원하는 것을 곡진히 따르는 자이다. 마음이 편안하면 기운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세조의 질환은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병이었다. 잇따른 피붙이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으면서, 세조는 야사들이 전하듯이 구천의 원혼들이 자신을 저주하는 공포에 시달렸다. 세조는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불교에 의존했다. 특히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병에 걸렸을 때 의지했던 중 신미를 다시 불렀다.
세조 10년 2월 18일, 그는 질병 치료를 위해 온양 온천을 향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속리산 복천사에 있는 신미를 만나고자, 신미의 동생 김수온을 데리고 충청도로 향했다. 2월 27일 신미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나서, 세조 11년 국가에서 물자를 지원하여 중건한 절이 오대산 상원사다.
심지어 세조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통치자가 불교를 지원하는데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당사자와 자손을 모두 내수사의 노비로 만들었다. 황보인의 손녀사위 김종련이 그 당사자다. ("임금이 일찍이 불설(佛說)을 물었을 때, 김종련이 논대(論對)하는 것이 자못 임금의 뜻에 거슬리었다.")
세종을 짓누른 내면의 병
세조의 질병에 대한 실록의 기록은 약 43회에 걸쳐 나타난다. 세조 10년부터 본격적으로 질병에 시달리는데 즉위 12년, 나이 쉰이 되면서는 상당히 병이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 14년 7월 19일에는 신숙주, 구치관, 한명회를 불러 자신의 전위를 심각하게 의논하지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친다. 그러다 14년 9월 8일 나이 52세로 수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조가 야사에서 거론되는 피부병으로 고통을 받았는지는 실록의 기록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조가 관절 질환이나 신경통으로 추정되는 풍습으로 고통을 받았고, 또 칠기탕 등의 처방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음을 짓누르는 병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의 죽음은 곪을 대로 곪은 내면의 병이 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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