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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멘탈 동의보감

대통령 외국어 연설은 ‘태음인’식 소통

대통령 외국어 연설은 ‘태음인’식 소통

분명 똑같은 걸 함께 보고도 동상이몽을 한다. 각자의 시선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타고난 성정의 치우침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상대만 고치려 들게 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해당 국가의 언어로 연설한 것에 대한 논란도 그런 예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선 영어로, 중국에선 중국어로, 프랑스에선 불어로 연설을 했다. 이를 두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공식 언어는 우리말”이라며 “해외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당당했으면 좋겠다”고 비판했다. 5개 국어 구사능력에 대해 “좋은 시계 찼다고 자꾸 보여주면 촌스럽지 않으냐”며 힐난했다.

  

태음인과 소음인의 시각차다. 태음인은 ‘예(禮)’를 타고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사양지심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맞춰준다. 외국어 연설 또한 상대국 배려 차원이다. 그 이면에는 상대국도 우리를 호의적으로 봐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반면, ‘지(智)’를 타고난 소음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지심이 강하다. 소음인의 언행은 기본적으로 나의 옳음을 드러내는 자긍심에서 출발한다. 외국어 연설도 내가 옳고 내가 잘났음을 뽐내는 의미가 된다.

정치성향을 배제한다면, 소음인은 ‘외교원칙을 지키자’는 김 대표 주장에 동의하기 쉽고, 태음인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비판’이라고 혀를 찰 수 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선 ‘편한 모국어를 놔두고 국익을 위해 힘들게 준비한 연설인데 괜한 트집만 잡는다’고 여기기 쉽다. 반면 김 대표 입장에선 ‘외교원칙도 모른다’고 답답해한다. 태음인은 자신의 배려심까지 무시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열 리 없고, 소음인은 왜 가타부타 말이 없냐며 더 답답해한다.

‘말’에 대한 관점도 마찬가지다. 소음인은 자기 사고는 어떻게든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소통의 전제다. ‘다름’을 확인한 순간 시비를 가려 어떻게든 일치시키고 싶어 한다. 당연히, 말과 글을 통한 소통이 전제다. 이런 기질은 지식 발전의 기초가 된다. 반면 태음인은 ‘말’보다 ‘행동’이다. 백날 말로 해봐야 소용없고, 행동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태음인에게 ‘말을 잘한다’는 ‘말만 잘한다’는 부정적 뉘앙스가 늘 감춰져 있다. 대신, 말로 하지 않아도 사람 도리는 알아서 챙기는 인륜에 밝다.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신뢰 여부를 판단하려는 게 태음인이라면, 우선 말이 되는지 논리부터 따지자는 게 소음인이다. 그만큼 차이가 크다. 그런데, 소음인은 태음인에게 “왜 말을 안 하느냐”며 ‘불통’이라 소리치고, 태음인은 소음인에게 “예의도 모른다”며 속으로만 섭섭해 한다. 아예 입을 닫아버린다. 태음인은 자기 속내를 표현하지 않고 복심을 알아주기만 기다린다. 그러나 소음인은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황당해한다. 함께 보고도 각자 입장에서만 받아들인다. 이런 시각차는 ‘남과 여’처럼 우열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태어난 것뿐이다. 서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님을 깨달아야 소통이 된다.

굳이 정치만이 아니다. 이혼 위기에 놓인 부부나 피를 나눈 부모·자식 간 갈등도 마찬가지다. 서로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체념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만의 소통방식에 대한 고집과 상대 방식에 대한 몰이해가 존재한다.

타고난 장점도 자기 방식만 고집하면 결국 독이 된다. 자기 경험 속에만 안주하려 입을 닫아버린 태음인의 고집은 배려가 아닌 교만이 된다. 끝까지 자기 옳음만 주장하느라 상대의 진심과 기분은 헤아리지 못하는 소음인은 자긍심만 강해진다.

이처럼 사람 간 갈등에서 비롯된 몸과 마음의 병은 결국 자신의 치우친 성정을 돌아보는 데서 답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100여년 전 이제마가 유토피아를 꿈꾸며 남긴 사상철학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