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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멘탈 동의보감

‘이명박 콤플렉스스러운…’

‘이명박 콤플렉스스러운…’

흔히 빛은 숭배하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나쁘다고 여긴다. 그러나 음지에 감춰진 콤플렉스가 우리네 삶엔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사진)의 경우도 그렇다. 그가 30대에 대기업 사장이 된 데 이어, 서울시장과 대통령에까지 오른 것도 바로 콤플렉스의 힘이다.

지독한 가난에 하루 두 끼를 술지게미로 때우면서도 주경야독으로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말 그대로 자수성가의 전형이며 샐러리맨의 신화 그 자체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은 바로 지독한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콤플렉스와 동일한 에너지다. 지독하게 열심히 살고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함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고, 태국 건설현장 폭동 때는 회사 금고부터 끌어안고 죽기 살기로 버텼다. 그에게 지독한 가난이 준 콤플렉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화들이다. 이처럼 인생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를 때, 콤플렉스는 엄청난 에너지를 제공하고 때론 사회적 성취로 이어진다.

 

그러나 칼 융은 “삶의 전반부는 수백 가지 기술을 익히며 혼신을 다 해야 하지만, 삶의 후반부에는 전일성 회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가난이란 콤플렉스를 지렛대로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삶의 후반부에는 달라져야 한다. 두 대극적인 상황에서 한쪽을 희생시키며 표출된 엄청난 에너지만으론 반쪽의 진실은 접근하지 못한다. 반쪽 힘으로 전부를 통제하려다 오히려 ‘광신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경고한다.

‘4대강 사업’처럼 불도저식의 추진력은 ‘개발시대의 무모한 행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또한 ‘먹고사는 것이 전부’라는 성장기에 뿌리 깊이 각인된 가난 콤플렉스다. 경제 외에 환경이나 문화까지 고려할 만한 새 인지체계가 없다. 삶 전반부의 추진체를 후반부에도 똑같이 적용한 결과다. 오로지 올라가기 위해서만 발달된 마음의 근육을, 내려가는 시점에서도 그대로 사용한 셈이다.

중년기 이후에는 자신의 성취 이면에 어떤 그림자가 존재하는지를 인지하고 이를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를 모르면 결국 신경증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이 전 대통령의 경우 서울시장 시절 ‘공짜 테니스’로, 대통령 퇴임 후에도 ‘황제 테니스’ 사건으로 구설에 올랐다. 불과 몇 만원의 사용료까지 미납해 빈축을 샀다.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사건도 마찬가지다. 대통령까지 지냈고 수백억 재산을 감안하면 굳이 왜 저럴까 의아해하는 이들도 많다.

무의식은 현실과 상징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금액의 크기를 떠나 재물이 줄어드는 것은 예전의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되돌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다. 더 모으고 더 높이 올라가야만 안전하다는 자동반사적 마음의 공식이다.

그러나 파우스트의 멤피도 말하지 않았던가.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밀리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삶 전반기 자신을 지탱한 콤플렉스를 인지하지 못하면, 후반부엔 그 콤플렉스에 끌려간다.

예컨대 술로 세월을 허비한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수성가했지만 정작 자신도 알코올 중독자가 된 환자사례나, 폭력적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불안이 자수성가의 밑거름은 되었지만 정작 자신도 분노조절장애를 보이는 중년 남성 모두 콤플렉스를 돌아보지 못한 결과다. 사회적으로 큰 성취가 자기 내면세계의 온전함을 방증하진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콤플렉스를 돌아볼 기회를 막는다.

콤플렉스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험한 세상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이다. 그러나 앞으로 마주할 세상에선 새 힘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고 과거의 불안을 피하려던 낡은 방식만 고집하면 결국 노추(老醜)로 이어진다. 지금껏 쌓아온 신화조차 물거품이 된다. 큰 성취도 쉽지 않지만, 잘 늙어간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다. 돈과 직위로 해결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콤플렉스를 스스로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