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은 여러모로 긍정적인 단어다. 그러나 어둠이 없으면 한 줌의 빛도 만들어질 수 없듯이, 자수성가의 성취 뒤에 가려진 그림자의 크기 또한 작지 않다. 학습우울증과 폭식증으로 내원한 여고생. 줄곧 상위권을 유지해왔다는 아이는 “그냥 공부가 싫다”는 한마디만 하곤 입을 꾹 닫아버린다. 대신 아버지가 “성적이 계속 떨어져 걱정”이라며 “무엇보다 가타부타 말이 없어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아버지는 열성적으로 뒷받침하는데도 모든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딸에 대한 불만을 이어간다. 한 학기 전 수학시험을 크게 망친 뒤 학습우울증이 시작되었는데, 부쩍 체중이 늘고 옷이나 외모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다. “시험 한 번으로 좌절하는 걸 보면 딸의 자존감이 낮은 것 같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존감은 어린 시절 부모의 적절한 칭찬을 먹고 자란다. 그런데 “세상 사는 어려움도 겪어가며 나처럼 강하게 컸으면 한다”는 엄한 아버지에게서 그런 자양분이 될 만한 칭찬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단적인 예로, 긴 머리 관리에 필요한 머리핀을 사달라는 딸의 요구에 아버지는 아예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게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소음인, 그 중에서도 태양기가 강한 심리유형이다. 원리원칙이나 소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주변과 좀체 타협하지 않는다. 대신 내 편은 맹목적이라 할 만큼 편애하고 감싸준다. 그런데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주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강권한다는 게 문제다. 사상의학에서 말하는 소음인의 ‘긍심(矜心)’으로, 이런 면이 주변을 힘들게 한다는 점을 정작 본인은 못 느낀다.
아버지의 긍심은 ‘열성적인 뒷바라지’로 포장되어 합리화된다. 딸의 진학 문제나 옷차림, 심지어 머리모양 하나까지 아이의 의견은 묵살되고 모든 것이 아버지 결정뿐이다. 학습우울증의 표면적 출발은 성적 하락이지만, 이면에는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존재한다. 딸은 표출하기 어려운 억울함, 분노에 대한 보상심리로 폭식을 하게 됐고, 성적 대신 외모를 꾸며서라도 관심을 받고 싶어했다. 그런 딸의 냉가슴을 녹여줄 따뜻함이 필요했건만, 아버지는 ‘단정하게’라는 말로 차가운 삭발을 단행했다.
결국 태음인 딸이 선택한 것은 ‘수동공격’이다. 자신의 속내는 일절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수동적 거부를 통해 알아주길 기다린다. “그냥 공부가 싫다”고 말하지만, 실은 답답해하는 아버지에 대한 최대한의 분노이자 공격이다.
아버지에게 영화 <서편제> 속 아버지처럼 되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한이 서린 판소리를 위해 독약을 먹여서라도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목표지향적 아버지와 닮아 있지 않는가. 아버지와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아이는 자신의 억울함을 대변해줄 때 말없이 굵은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가 자신의 지나침을 인정하자 빙긋이 웃었다. 폭식증 치료에 도움이 되는 한약을 처방했고, 아버지의 심적 변화 덕분에 아이의 식탐도 학습우울증도 모두 사라졌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어릴적 고생한 마음의 그림자를 갖고 있다. 하지만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그 그림자를 대물림하지 않아야 비로소 자수성가가 완성된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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