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솥에 증기 배출구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맛있는 밥은 고사하고 밥 짓는 사람이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욕구 또한 마찬가지다. 기본 욕구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폭발력이 배가되어 돌아오기 일쑤다. 그런데 우리는 식욕이나 수면욕은 생산을 위한 재충전으로 여기면서 유희 본능은 억누르려고만 하는 경향이 있다. <명심보감>에도 ‘모든 유희는 무익하고, 오직 근면만이 공이 있다(凡戱無益, 惟勤有功)’고 가르친다.
우울증 약을 먹고 있다는 60대 환자. 한참동안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할머니는 “아무런 의욕도 없고 밤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한다. 입맛도 없지만 그나마 조금 먹고 나면 가슴 어딘가 답답하고 꽉 막힌 것 같다고 한다.
중병으로 투병 중인 동생을 직접 간병한 것이 계기였다. ‘어쩌면 다신 보지 못할 텐데…’라는 간절함에 동생에게 자신의 집으로 짐을 싸서 오라고 했다. 두어 달 함께 지내면서 손수 간호해주려고 한 것이다. 애초의 바람은 ‘오순도순 자매의 정을 느끼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밤마다 구토와 통증에 흐느끼는 환자를 숨돌릴 틈도 없이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포기하고 동생을 동생 집으로 보냈다. 이후 할머니에게 불면증과 환청이 생겼다.
할머니의 체질은 태음인. 정에 이끌려 일을 크게 벌였다가 뒷감당이 안되면 공황상태에 빠지기 쉬운 체질이다. 무엇보다 아픈 동생을 돌려보냈다는 ‘죄책감’이 주된 원인이다. 예(禮)를 타고나 인륜을 잘 아는 태음인이기에, 인륜을 저버린 듯한 양심의 가책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환청은 가책에서 비롯된 자기 내부의 소리다.
고령임을 감안해 그동안 축난 몸을 추스르는 보약과 억압된 죄책감을 덜어주는 면담치료를 병행했다. 젊은 자식들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노인이 맡으려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지금이라도 동생을 병원에 입원케 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아가 말벗을 해주면 동기간의 도리는 다하는 것이라고 위로했다. 얼마 뒤 할머니는 “입원한 동생이 고마워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후 환청도 사라졌고 우울증 약 없이도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가족 간병을 하던 보호자가 도리어 병을 얻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환자에게 가려 아파도 호소조차 하기 힘든 분위기다. 무엇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간병과정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어도, 스스로의 양심 때문에 주위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언제 끝나나… 차라리 이제 그만 끝났으면…’ 하다가도 ‘인간으로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며 자기를 억압하게 된다. 이럴 때 꼭 필요한 처방이 ‘햇볕’이다. 환자와 병실을 떠나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간병인은 “아픈 사람을 놔두고 나 혼자 어떻게…”라는 반응을 보인다. 가급적 즐겁게 지내고 맛난 외식도 하시라 하면, 마치 현충일에 술 마시고 노는 것 같은 죄책감부터 갖는다.
그러나 환자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보호자가 지치면 환자도 힘들다. 보호자의 활력이 환자의 생존의욕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럴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다. 유희는 결코 무익하지 않다. 때로는 극한의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증기 배출구이자 재충전을 위한 훌륭한 보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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