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 잘 되면 기쁘다는 뜻의 ‘송무백열(松茂栢悅)’. 이 말이 과연 치열한 경쟁 속에 사는 이들에게 얼마나 공감이 될까. 어쩌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정신의학적으론 더 타당해보인다.
학습우울증으로 내원한 고3 여학생. 하루종일 가슴이 답답해 책을 보고 있어도 머리가 멍하고 속이 울렁거려 집중이 안된다. 벌써 1년 넘게 병원검사를 했지만 원인을 못 찾았고, 여러 가지 약도 효과가 없었다. “영재로까지 선발되었던 아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엄마는 답답해했다.
신체증상 이면의 심리적 원인이 관건이지만, 아이도 부모도 교사도 모두 떨어진 성적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1년 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내로라하는 우등생만 모인 학교에서 반편성 시험으로 A, B반을 갈랐다. “애매한 문제 한 두개로 우열반이 갈렸다”며 마음으로 승복되지 않는 아이는 열등반 꼬리표가 붙은 B반이 되었다.
늘 1등만 해온 아이에겐 자존심에 또렷한 주홍글씨가 새겨진 듯 보였다. 게다가 A반 친구들 몇몇은 이 학생에게 “그동안 잘난 척했다”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분하고 억울한 느낌에 공부할 때마다 친구 모습이 떠올라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험 중에도 머리가 몽롱해져 최상위권이던 성적이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원서내는 것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울먹였다.
우울증이나 화병은 자신과 공감해줄 단 한 사람만 있어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는 고립무원이었다. 진심을 나눠줄 또래 친구는 오로지 경쟁자일 뿐이다. 엄마 역시 “일년째 아이 짜증을 받아주느라 두통에 시달린다”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마 선생은 마음의 큰병은 대부분 ‘투현질능(妬賢嫉能)’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내적 불만을 ‘남 탓, 세상 탓’으로 외부에 투사하는 것이다. B반을 희생양으로 왕따시킨 것이나, 모든 것이 A반 친구의 말 한마디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여기서 일의 선후나 시시비비는 중요치 않다. 아이가 마음을 다잡고 수능을 무사히 마치는 것이 우선이다. 오히려 상처 준 친구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라거나 섣부른 학습독려는 증상을 악화시키기 십상이다. 그래서 차라리 아이의 경쟁의식과 투사를 인정해주라고 권유했다. 다만, 어떤 것이 훗날 이기는 길일지 생각하도록 했다. 지금처럼 마음속에서 친구를 원망하며 계속 싸울것인가, 아니면 잠시 도망가 내 길을 묵묵히 갈 것인가. 애초 목표하고 기대했던 최상이 아니면 지금부터의 최선은 의미가 없는가.
아이는 다행히 통쾌한 복수이자 승리가 어떤 길인지 현명한 선택을 했다. 덕분에 머리를 맑게 해주는 한약도 효험이 있었다. 성적을 떠나 시련에도 꺾이지 않고 중심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경험은 더 큰 인생 학습이 될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 언제고 주변의 날카로운 독설에도 견딜 수 있는 예방백신을 맞은 셈이다.
다소 어려웠다는 수능 다음날 “아주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문제를 풀었다”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이제는 아이에게 이기는 법 대신 ‘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자는 괴로워 눕게 되니 가급적 승패는 버리고 즐겁게 살라’는 법구경 한 구절을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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