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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한방춘추

독불장군은 功이 없다, 상처만 주기에


“조조나 진시황은 공(功)이 없다.” 대제국을 건설한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이처럼 혹평한 이는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다. 깨달음이 없으니 후세에 교훈되는 바 없고, 규모가 아무리 커도 탐욕일 뿐이라는 것. 권력을 바라보는 이제마의 냉철한 관점이다. 사상의학은 가족간 갈등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문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며 내원한 50대 후반의 한 여성. 경계증(驚悸症·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늘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며, 조그마한 일에도 놀라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증상)으로 죄지은 사람마냥 시도 때도 없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불면증, 두통, 견배통 등을 수년째 달고 살아 병원에도 가보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한다.

어느날 남편과 딸이 보호자로 함께 왔다. 남편은 후두암 말기환자로 휠체어에 의지한 초췌한 모습이었다. 남편이 보약을 지어주고 싶다고 성화를 해 부인이 마지못해 따라왔다는 것이다. 남편은 발성조차 불편한데도 환자와의 대화 도중 의사의 말을 불쑥불쑥 자르고 나선다. 의사와 딸이 옆에 있는데도 아내의 답변이나 생각은 틀렸다며 무시한다. 환자가 오히려 민망해하며 “이 양반은 말대꾸하면 난리납니다. 그냥 제가 참고 말아야죠”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진료실에서 잠깐 드러난 상황이지만 지난 세월 이 부부가 어찌 살아왔을지 밑그림이 그려진다. 또 부인의 경계증이 왜 생겼으며 왜 그동안 낫지 않았을지도 짐작된다.

사상의학적으로 이 여성환자는 ‘예(禮)’의 성정을 타고난 태음인이고, 남편은 ‘지(智)’를 타고난 소음인이다. 소음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며 몰입하여 결론을 추론하는 ‘사고’가 우월기능이다. 반면 자신의 관심사만 좁고 깊게 파고드니 주변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열등하다. 여기에 강박적 성향이 더해지면 자신의 생각과 결론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드러낸다. 내 생각이 옳은데 무엇이 문제냐는 식이다. 아내나 자식은 아랫사람이라 여겨 함부로 대한다.

반면 태음인인 부인은 남편의 무례한 요구나 언행도 일단 수용하고 참고보는 성정이다. 한평생 남편으로부터 상처받으며 홧병을 키워온 것이다. 환자에게 “밖에서 일할 때가 차라리 덜 아프시죠?”하고 물으니 “그걸 어떻게 아시냐”며 반색한다.

이 환자에게 가장 어려운 환경은 다름 아닌 남편이다.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고, 피하려야 피할 수 없었던…. 그러나 말기암 환자인 남편에겐 남은 시간도, 자신의 성정을 돌아볼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여성 환자에게 태음인의 근육 긴장을 풀어주고 심장기능을 강화하는 한약을 처방해주었다. 또 태음인 경계증에 도움이 되도록 하루 20~30알 정도 잣을 먹도록 했다. 동시에 부부간 화해를 돕는 차원에서 태음인과 소음인의 성정 차이를 설명해줬다. 남편의 언행에서 비롯될 심리적 상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얼마 뒤 환자는 남편과 사별했다. 그는 “이제 한약을 먹지 않고도 지낼 만하다”고 말했다. 작은 권력이라도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라 상처일 뿐이라는 이제마의 가르침을 보여주는 사례다. 약자에 대한 공감보다 정답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공’을 쌓았다 착각하며, 가까운 이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필자를 포함한 대한민국 필부들의 모습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