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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멘탈 동의보감

아이를 비관론자로 키우는 잔소리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신세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 모두 적의 진영으로 주인공들이 신분을 위장해 들어간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는 북한요원들이 남한에 간첩으로, <신세계>에서는 경찰이 조폭으로 위장 잠입한다.

그러나 두 영화는 잠입 후 적을 모조리 섬멸하는 <람보> 유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막상 적진에서 활동하면서 누가 진정한 내 편인가라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아울러 적군과 아군 간의 묘한 심리적 경계 허물기를 보여준다. 그 동력은 바로 ‘신뢰’다. 같은 경찰도 경찰인 자신을 감시하고 못 미더워하는데, 진짜 조폭이 나를 믿어준다면? 심지어 내가 프락치임을 알게 된 뒤에도 변함없는 신뢰를 보이기에 갈등할 수밖에 없다. 반면 더 이상 나를 믿지 않는 옛 상관은 더 이상 내 편으로 신뢰할 수 없다.

가장 믿었던 대상의 불신은 더욱 고통스럽다. 이런 갈등이 가장 빈번한 상황이 바로 부모와 자식 간이다. 부모가 자식을 신뢰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잔소리’다. 부모의 잔소리에는 기본적으로 아이에 대한 불신이 담겨 있다. 부모가 잔소리하지 않으면 아이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평가절하다. “이렇게 잔소리를 해도 겨우 하는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잔소리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의 날갯짓을 포기한다는 이치는 이해 못한다. 대신 부모는 잔소리를 합리화한다. 자식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라 여긴다.

점점 생각 없이 습관처럼 잔소리를 한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숨이 막힌다. 우울과 분노 속에 갇혀 제 역량을 발휘 못하고 신음한다. 뒤늦게야 이를 발견하고도 부모는 “그토록 희생했는데 왜 내 아이는 이럴까”라며 한탄한다. 반면 아이는 “왜 치료를 내가 받아야 하냐”며 부모를 원망한다. 아이는 부모가 먼저 달라지라며 버티고, 부모는 의사에게 자신의 입맛대로 아이를 바꿔달라고 맞선다.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며 불신하는 광경이다. 아이도 괴롭고 부모도 괴롭다. 이 고통은 도대체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부모는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잔소리를 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어릴 때 잔소리를 많이 듣고 자라면 매사가 부정적이며 소극적으로 변한다. 강력한 외부압박 없이는 성취동기가 유발되지 않는다.

성장해서 부모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자녀의 내면에는 부모가 각인시킨 자기비하의 목소리가 자리 잡고 있다. 부정적 시선이 강해져 별 뜻 없이 한 말에도 혼자 상처받거나 대인기피증으로도 이어진다. 열등의식이 높고 삶의 영역 또한 좁아질 수밖에 없다.

윈스턴 처칠은 “낙관론자는 고난이 찾아와도 기회를 보지만, 비관론자는 매번 기회가 찾아와도 고난만 본다”고 말했다. 바로 부모의 잔소리가 아이를 비관론자로 성장시킨 것이다. 아이들이 겪는 최악의 경험은 부모의 불신이다. 잔소리에 담긴 부모의 부정적 시선이 아이 인생의 모든 대인관계에서 기본공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잔소리는 애정이 넘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봐야 한다. 부모가 불안해서 이를 잠재우려 아이를 뒤흔든다. 잔소리에는 객관성도 희생도 없다. 또한 길도 소망도 없다. 애정이 있다면 은밀한 시선으로 지켜봐주고 더뎌 보여도 기다려줄 수 있다. 당장의 기대치만 성급히 전달하려 하기에 위대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기대감은 심어주지 못한다.

잔소리를 하는 부모가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나는 무엇이 불안한 것인가. 과거 무엇에 상처받았고, 무엇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는가. 그 내용들이 어떻게 지금 내 아이에게 투사되는가를 알아야 잔소리를 멈출 수 있다. 그래야 부모와 자식 간에 신뢰와 긍정이라는 신세계가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