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서울대를 못 가서 생긴 병입니다.” 기면증으로 내원한 두 청년이 공통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7~8시간을 자고도 아침에 일어나질 못하고,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고 졸려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고 호소한다.
ㄱ씨는 재수생이다. 고3 초에 시작된 기면증 때문에 서울대 진학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특이한 건 그때도 지금도 성적은 중하위권이란 점이다. 그런데도 그는 “작년에도 서울대를 지원했고, 앞으로도 서울대만 응시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진 기면증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것일 뿐, 기면증만 나으면 서울대를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왜 이토록 현실 인정을 못하고 서울대만 집착하는 것일까. 몇 가지 사연이 있었다. 그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면서 성장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수없이 되뇌었다. 청소년기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 결국 전학을 간 뒤 하위권이던 성적이 많이 향상됐다. 그때 친구들도 자신을 인정해주고 선생님 또한 덜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ㄱ씨는 ‘만약 서울대만 가면 모든 게 한 방에 해결되겠다’ 싶은 결론에 이르렀다. 즉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과한 목표에 집착한 것이다.
▲ 서울대학교 정문.
어느 순간 감기처럼 외부로부터 기면증에 걸린 것이 아니다. 현실과 괴리가 큰 목표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에서 스며나온 병이다. 한 단계 위의 목표는 의욕과 집중력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목표가 지나치게 과하면 기가 꺾인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언제 저 많은 걸…’이라며 지레 포기하고 싶어진다. 목표와 포기 사이의 타협안이 기면증이다. 목표는 유지하되 포기의 명분도 찾는 것이다. ㄴ씨는 연세대 2학년이다. 연대 합격 후에도 무조건 서울대를 가겠다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수를 했다. 실패했고 결국 다시 연대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서울대를 못 갔다는 우울감에 강의에 집중을 못하고 학점관리도 엉망이다. ㄴ씨는 왜 서울대에 집착할까.
그가 스스로 찾은 이유는 “단짝이 서울대를 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수차례 상담으로 찾아낸 진짜 원인은 부모에 대한 ‘수동공격심리’였다. 수동공격이란 주로 약자가 선택하는 공격방식이다. 강자는 그냥 공격하면 된다. 그러나 약자는 수동적이고 우회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때로는 강자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소극적 저항으로, 때로는 자신을 파괴해서라도 그를 안타까워할 강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ㄴ씨는 부모의 엄한 훈육과 자신의 의사를 번번이 묵살한 것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결국 연대에 합격한 순간, 그동안 어찌할 수 없었던 부모에 대한 분노로 ‘서울대’를 명분으로 삼아 반격에 나선 셈이다. 서울대 친구도 ㄴ씨가 합리화를 통해 찾아낸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애초에 모든 동기유발은 부모에 대한 수동공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의식이 진짜 원했던 목표는 서울대 합격이 아닌 낙방인 셈이다. 그래야 부모도 고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기에 대학생활의 부적응까지 연이은 자기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명분과 자기합리화가 바로 기면증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콤플렉스와 분노가 일으킨 착각에 감쪽같이 속은 것이다. 대신 이들은 기면증을 신체 질병으로 보고 싶어 한다. 마음의 착각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반사적 대응이며 자기방어다.
다양한 삶의 난관에 직면한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우울증만 없다면…’ ‘불면증만 나으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청년의 착각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에 갇혀 힘들다면 결국, 질병 자체가 아닌 자신의 뒤통수를 돌아볼 때다. 그만두자니 괴롭고 억지로 하자니 불쾌한 그 무언가 착각의 실체를 구체화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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