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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한방춘추

눈치 없는 소음인, 표현 서툰 태음인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심전심을 꿈꾼다. 나는 상대가 표현한 언행만 보고 판단하면서도, 상대는 내 언행이 아닌 속마음까지 봐주길 바란다. 오해와 갈등은 여기서 비롯된다.

만성피부염으로 내원한 30대 주부. 2년째 온몸이 가려워 피가 날 정도로 긁어 상처투성이다. 그런데도, 뚱한 표정으로 증상 호소엔 소극적이다. 대신, 남편이 나서서 설명한다. 폐열을 내리는 한약을 복용한 뒤 피부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런데 환자는 “하나도 차도가 없고, 얼굴은 전보다 더 가렵다”고 말한다. 같은 약을 1일 4회로 복용량을 배로 늘렸다. 보름 뒤 남편은 “피부 톤도 더 밝아졌는데 얼굴만은 계속 더 가려워한다”며 “차도가 없는 것 같으면 다른 병원을 갈까라고 물으니 그건 또 싫다고 해 다시 왔다”고 말했다. 한약이 안 맞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병이 호전되었다고 인정하기 싫은 이유를 몸이 아닌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환자는 “남편은 자기 뜻대로만 하고 배려가 없다”고 말한다. 친정엄마 역시 불쑥 찾아와 이것저것 참견하며 자꾸 무얼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 모든 게 늘 짜증스럽다”면서도 그동안 다 맞춰주기만 했다.

전형적인 태음인과 소음인 간의 갈등이다. 소음인은 결론이 떠오르면 주변에 대한 고려 없이 일단 표현하고 행동한다. ‘내 생각이 옳은데 뭐가 문제냐’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태음인에겐 예의나 배려가 없어 보인다. 태음인은 못마땅하지만 일단 참고 맞춰준다. 갈등이 커질까봐 대충 넘어가자는 마음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소음인은 태음인이 결국은 다 들어주니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상처 주는 행동을 계속 반복한다. 결국 자신의 좋고 싫음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태음인은 참고 참다가 ‘뻥~’ 하고 화를 터뜨린다. 반면, 소음인은 ‘갑자기 왜 저러나?’ 하며 공감을 못한다.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는 소음인과 ‘이미 수없이 했다’는 태음인은 대립각만 세운다. 결국 ‘더 이상 말을 말자’는 결론에 이른다.

소음인은 상대가 예스(yes)라고 말하면 속마음도 당연히 예스라고 여긴다. 그러나 태음인이 무표정하게 예스라고 말했다면 그 마음은 노(no)다. 자신이 비록 예스라고 말하고 심지어 예스의 행동을 하고 있어도, 속마음은 노라는 것을 알아주길 기다린다. 정작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도, 상대가 몰라주면 야속해한다. 어떤 체질이 옳고 그른가는 의미가 없다. 타고난 성정이 다르다. 문제는 저마다 내 방식이 옳고 세상사람 전부가 다 나처럼 생각할 거라는 착각이다.

환자의 피부 가려움은 일종의 울화병이다. 박박 긁고 싶은 것은 어찌 피부만이겠는가. 당연히 ‘내 울분은 제대로 풀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피부염이 다 나았느냐’는 무의식의 항변이다. 그래서 얼굴만은 더 가려운 것이다.

표현하지 않으면 울화는 더 심해져 오장육부의 열독을 만들고 피부염을 유발한다. 그런데 환자는 점점 말문을 닫아간다. ‘내가 표현하면 상대는 내 뜻대로 변화해야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내가 말했는데도 상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입만 아프다는 식이다. 속만 터지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속내를 숨긴 침묵은 ‘교만’의 또 다른 모습이다. 표현하는 건 내 자유지만, 이후 선택은 상대 자유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표현해야 할까. 바로 나 자신이다. 당장, 상대가 변하리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표현도 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만 봐주길 바라면 울화가 더 치민다. 자신이 늘 피해자라는 인식을 바꾸면서 환자의 얼굴 가려움도 사라졌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심전심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아울러 내 행동보다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만큼, 상대 마음은 놓친 것은 아닌지부터 살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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