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지나친 환상은 현실 위에 내디딘 발걸음을 더욱 힘겹게 한다. 때론 가장 갖기 어려운 것을 가지려는 욕구로 원인 모를 아픔을 만든다.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늘 불안하다는 50대 여성. 남편이 조금만 늦어도 불안해 부부싸움을 자주 한다. 얼마 전에는 야간대학에서 주제발표 도중 쓰러졌다. 준비한 내용을 잘 읽어나가다 갑자기 불안해지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손이 마비되면서 정신까지 잃었다. 다행히 큰 외상은 없었지만, 이후 불안증상이 심해져 휴학을 했다.
환자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쳤다. 일찍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했고 사업체를 운영 중이다. 마흔이 넘어 검정고시부터 시작해 대학까지 진학했다. 그러나 환자는 “대학만 가면 즐거우면서도 이상하게 긴장되고 불안했다”고 말한다.
만학의 꿈은 곧잘 아름다운 열정으로 포장된다. 그러나 이면엔 때로 콤플렉스가 존재한다. 환자는 “몸이 아파서 이젠 자격증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미 자격증만 10개로, 모두 현재 사업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다.
중년에 현실적 목표 없이 몸이 아파도 공부하려고 기를 쓰는 것은 무언가 과장된 마음이다. 태음인의 경우 치심이다. 남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한 마음이다. 매사에 내가 좋아서 하는 열정이 아니라, 남에게 잘 보여지기 위한 몸부림이다. 삶을 즐기기보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산다.
환자의 과도한 불안은 학력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 강의실에서 쓰러질 당시의 무의식을 떠올리게 만들자 “가방끈이 짧은 검정고시 출신인데 발표하면서 점점 내 밑천이 드러날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교수들로부터도 늘 칭찬과 주목을 받고 싶었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다. 필요 이상 인정받으려 애썼던 중압감이 불안을 키웠다.
불안은 교수, 남편 등 모두 남성과 있을 때 나타났다.
이는 아버지와의 상처 때문이었다. 고학력에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고향마을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사업에 뛰어들었다 실패를 거듭하자 어머니에게 “못 배운 너랑 결혼해 나까지 이 모양 이 꼴”이라며 폭언과 폭행으로 화풀이를 해댔다.
어려운 형편을 안 초등학교 선생님이 대신 중학교를 보내주겠다고 나섰을 때도, 아버지는 “당신이 뭔데…”라며 오히려 화를 냈다. 두려움에 치를 떨며 ‘아버지가 없었으면…’하고 기도했던 환자에게 학업중단은 평생의 한이 된 것이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의 생존과 인정욕구가 모두 학력콤플렉스와 연결됐다.
이제 환자의 무의식은 ‘아버지, 당신이 중학교조차 못 다니게 했지만 나는 보란 듯이 대학까지 졸업했다’며 한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럼에도 기억 속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학구열로 포장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옥죈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가보지 못했기에 더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럴수록 주위 시선과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대신 주어진 삶을 진정 즐길 수 있는 에너지와 시간은 줄어들고, 불안과 긴장 속에 자신을 가둬온 것이다.
환자는 “아버지 무덤에라도 대학졸업장을…”이라며 울먹였다. 부질없음의 눈물을 흘린 뒤 불안증상은 눈 녹듯 사라졌다. 아버지와 화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고귀하다. 그래서 화해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다.
이제마는 “장수(長壽)란 사망까지의 생물학적 시간보다, 내면의 상처를 바르게 이해한 후의 삶의 길이에 비례한다”고 말했다.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속 상처 대한 이해는 그 어떤 졸업장이나 자격증보다 공부해볼 가치가 크다. 그 속에 더 아름다운 현실의 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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