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가 없어 보이는 것에 가장 큰 대가가 숨어 있다. 부모·자식이나 부부도 마찬가지다.
괴테는 “조상에게서 상속받은 것은 그저 소유하기 위한 것일 뿐, 사용치 못하는 재산은 무거운 짐이 될 따름이다.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만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심한 두통과 감정조절장애로 내원한 30대 여성. 딱히 잘못도 없는 어린 딸을 봐도 매일 화를 낸다. 혼자 있으면 눈물이 났다가 금방 헛웃음이 난다. 두통은 웬만한 진통제는 듣지도 않고,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심신이 다 지쳐 있다.
고부갈등 때문이었다. 환자는 좋은 대학을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지만, 집안에선 파출부나 다름없다. 시어머니는 ‘파출부가 하는 청소는 깨끗하지 않다’며 며느리가 직접 다 하길 바란다. 근처로 이사 온 시누이는 아이 맡기는 건 예사고, 이젠 자신의 집 청소까지 시킨다. 그런데 남편조차도 ‘그냥 네가 좀 참아라’며 수수방관이다.
함께 내원한 친정엄마는 “사위가 ‘마마보이’인 것도 있지만, 모든 게 시어머니 재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시어머니의 땅이 재개발로 값이 엄청 오르자, 모두들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변호사인 남편 연봉 역시 많지만, 비교가 안된다. 친정엄마는 “예단 문제로 무례하게 나올 때, 혼사를 그만두자는 남편 말을 들었어야 했다”며 “그래도 ‘사’자 사위 볼 욕심에…”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렇다면 환자는 못된 시댁 식구와 남편, 신랑감을 잘못 골라준 친정엄마 때문에 고생만 하는 가련한 희생양일까. ‘매일같이 이혼을 떠올린다’면서도 못하는 이유를 묻자, “아이 때문에…”라며 말끝을 흐렸다.
과연 전부일까? 환자는 ‘사’자 남편의 덕과, 시어머니의 재산에는 욕심이 없었을까. 매일 증오에 찬 엄마 목소리를 들으며 자라는 환경이 과연 아이를 위한 선택일까.
남편과 시댁 문제로만 보면 돌파구가 없다. 잘난 아들 둔 유세와, 돈으로 자식조차 하인 부리듯 하겠다는 시어머니를 바꿀 방법이 있던가. 또, 아내의 고통보다 부모 재산에 목을 매며 독립할 의지가 없는 남편이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할까.
환자의 ‘두통’은 친정엄마부터 남편과 시어머니까지 주변의 탐욕들이 뒤엉킨 결과다.
그러나 ‘시어머니나 남편이 조금만 달라졌으면…’ 하고 기다리면 더 깊은 고통에 빠질 뿐이다. 달라지기 어렵고 당사자들로서는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그들대로 대가는 있다. 자식들은 ‘부모가 빨리 죽어야 저 많은 재산 빨리 받을 텐데, 그때까지만 참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부모 덕 볼 생각에 가장의 덕(德)은 망각한 남편 역시 ‘병든 아내와 상처투성이 딸’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기 쉽다.
환자의 선택이다. 그런 시어머니, 그런 남편과 여생을 함께할 것인가 말 것인가. 구차해도 변호사 사모님으로 살며, 시어머니 재산에 복종하는 삶도 하나의 선택이다. 대신, 그로 인해 겪는 고통은 그 대가이니 억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정반대의 선택도 있다. 문제는 두 가지 중 환자 입맛대로 고를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한 달여 치료 후 많이 호전되었다. 물론, 남편도 시어머니도 달라진 건 없다. 환자의 마음이 바뀐 것뿐이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 내 선택의 결과이며, 현재 내 선택에 의해 앞으로의 고통이 달라지는 이치를 받아들인 것이다.
주변을 바꾸려 몸부림칠수록 고통은 더 심해진다. 내 선택으로 내 인생을 바꾸는 것뿐이다. 주변에서 나를 괴롭힌다고만 여기는 착각이 고통의 원인이다.
공짜는 없다. 대신 공짜를 바라는 마음의 대가는 반드시 있다. 그래서 괴테는 “술을 갈망하는 자, 익은 포도알부터 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변의 힘이 아닌 내 손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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