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즉통 통즉불통(不通則痛, 通則不痛). ‘통하지 않아서 아프고, 통하면 아프지 않다’는 한의학 침구경락이론이다. 통증과 질병을 부분의 문제보다 전체의 불균형과 소통의 관점에서 본다. 마음의 병 역시 마찬가지다.
만성피로와 무기력증으로 내원한 중학생. 엄마는 “몸이 약해졌는지 하루 종일 잠만 자려 한다”며 보약을 원했다. 또 “공부도 유독 더 힘들어하고 변비와 소화불량까지 겹쳐 몸이 말라간다”며 걱정했다.
그러나 고개만 푹 숙인 채 무성의하게 내뱉는 아이의 말투에서 단순 피로가 아님을 짐작했다. 아이는 3개월 전 ‘스마트폰을 사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했다. 엄마는 “게임만 더 자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모든 게 그 이후 갑자기 시작된 증상이었다.
아이의 체질은 소음인. 무의식적으로 거부감이 있는 상황을 마주하면 갑자기 잠에 빠져들기도 한다. 단순 체력저하가 아닌 기면증이다. 몸의 피로와 달리 무의식적 회피이자 분노의 또 다른 표현이다. 부모가 희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하루 종일 무기력한 모습을 통해 부모에게 고통을 준다.
인간의 공격방식은 두 가지다. 강자일 땐 그냥 직접 공격한다. 그러나 약자일 땐 그럴 수 없다. 대신 강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괴롭히는 수동공격을 한다. 일종의 불복종 저항인 셈이다. 아이의 기면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이도 자신이 졸린 진짜 이유는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를 혼내고 다그치면 해결될까. 두통이 있다고 머리에만 침을 놓는 건 하수다. 근본 원인을 찾아 때로는 손끝, 때로는 발끝에서 혈자리를 찾아야 한다. 스마트폰 중독 역시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저마다 ‘아이들의 통제력 부족’이나 ‘교사의 학생관리 소홀’ ‘휴대폰 제조사들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중독은 현실도피의 표면적인 증상일 뿐이다. 왜 스마트폰 속으로 도피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바로 부모와의 소통부재다. 공부 잘하는 형에 비해 부모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상위권인 형에 비하면 중간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성적은 자존심에 상처만 준다. 학교에 가도 환영 받질 못하니 재미가 없다. 집이든 학교든 아이가 당당하게 설 곳이 없다. 결국 게임의 가상현실 속으로 도피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강경했다. 대안학교로 전학시키고 지방의 치료시설에 보낼 계획이었다. 이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당장 게임을 못하니 중독은 해소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 마음은 어떨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라거나 ‘나는 절제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상처를 받는다. 분노는 더욱 침잠했다가 다른 일탈과 중독으로 언제고 표출될 것이다.
아이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은 꽉 막힌 현실을 부모가 공감해야 한다. 아이가 내심 더 원했던 건 스마트폰이 아니라 부모의 관심과 애착이다. 학교와 집 어디에서도 죄인취급이 아닌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리다.
어른이 변할 것인가, 아이를 뜯어고칠 것인가. 어느 것이 더 빠를까. 차라리 스마트폰을 사주도록 권유했다. 대신 사용시간과 계획을 스스로 정하고 지키도록 했다. 아울러 아버지는 게임을 배워 아이와 일정시간 함께하도록 했다. ‘게임은 나쁜 것’이라 단정짓고 야단만 치면 소통의 접점은 찾기 어렵다. 또 중독을 아이의 문제로만 인식하면 치료는 더욱 어렵다. 아이의 도피처로 부모가 함께 들어가야 한다. 막힌 경락 속으로 침(針)이 들어가듯이 말이다.
아이의 중독은 부모가 만든 결과물이다. ‘부모가 뿌린 씨를 이제라도 거두겠다’는 마음을 내야, 중독에 빠진 아이를 인도할 수 있다. 그 핵심은 바로 부모 자식 간 소통이다.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할 수밖에 없는 이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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