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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한방춘추

병의 원인은 몸 보다 마음에 있다


“밝은 낮에 인식하는 건 어린애 장난 같다. 고귀하고 신비로운 건 언제나 두려운 어둠 속에 깃들어 있다.” 괴테는 이런 곳을 끈기 있게 찾는 이가 바로 현자(賢者)라고 말했다. 병의 원인 역시 겉으로 드러나는 몸보다 더 깊고 어두운 마음속에 감춰져 있다.

폭식증으로 내원한 30대 여성. 복직을 몇 개월 앞두고 시작됐다. 남은 음식을 죄다 꺼내 속이 거북한데도 계속 먹다가 살이 찔까 덜컥 겁이 나 토해버린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이제는 냉장고 음식재료를 총동원해 요리를 만들어 모두 남편에게 먹인다.

남편은 처음에는 웬 진수성찬이냐며 좋아했다. 그러나 매번 양이 많아 남기게 되자 환자는 짜증을 내며 다 먹으라고 다그친다. 급기야 남편도 집에서 밥 먹는 게 겁날 정도가 되었다.

환자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면서 “친정엄마가 워낙 근검절약형이라 그 영향인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장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을 요리한다. 단순히 절약정신이나 내조라 보기엔 무언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게다가 도벽(盜癖) 충동까지 생겼다. 환자는 “대기실에서도 ‘커피믹스’가 눈에 들어와 몽땅 훔치고 싶었다”고 말한다. 평소 커피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환자의 모든 증상은 월경 전에 더 심해진다. 흔히, 월경전증후군으로 다양한 신체증상과 함께 도벽이 나타나기도 한다. 세로토닌 호르몬의 분비 이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피임약과 호르몬 치료도 소용없었다.

자신의 폭식도 모자라 남편까지 억지로 먹여야 한다는 강박적 욕구, 당장 필요도 없는 물건에 대한 충동현상 등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물질에 대한 과장된 욕구로, 이는 곧 내면의 불안과 상실감을 뜻한다. ‘내 것을 빼앗겼다’는 공허함에 대한 보상심리가 무의식에서 계속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공허함일까. 월경전증후군이라는 병명은 동일해도 상실감의 종류는 제각각이다.

환자의 경우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하는 성정과 관련이 있다. 소양기가 강한 의존형 태음인이다. 외향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당연히 갑갑한 가사나 육아보다는 바깥 직장생활을 선호한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인정욕구가 적절히 채워지지 못하고 눈치보며 성장한 경우다. 주변의 관심과 칭찬에 늘 목말라하는 심성이다.

남편의 사랑과 복직 후 주위의 시선과 관심을 갈망한다. 복직이 기다려지는 한편, 불안의 한 원인이 된다. 어른이 되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어려서는 유혹을 당하고 늙어서도 청혼을 받는, 그야말로 시인이 그려낸 여인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상실감 때문이다. 환자가 복직을 앞두고 가장 걱정하는 것 역시 입을 옷과 구두였다.

이런 상실감 반대편에 남편과 자식에 대한 죄책감이 존재한다. 가사나 육아는 그만두자니 괴롭고, 억지로 하자니 불쾌하다. 환자는 “결혼 전까지 내 속옷 한번 빨아본 적 없다. 모든 걸 엄마가 해줬는데 나는 엄마처럼 못할 것 같다”고 미안해했다. 남편에게 음식을 과도하게 먹이는 것도, 내조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상징적 행위다.

다른 환자들과 달리 폭식증 치료 한약에 처음에는 아무런 약 반응이 없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욕구가 감춰져 있는지를 분석한 뒤에야 폭식증과 도벽충동이 사라졌다. “더 강한 한약을 처방한 거냐”라고 묻지만, 달라진 건 약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이다.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를 얻기 위해선 포기해야 할 것도 있다. 괴테는 “찬양할 만한 미(美)의 속성이란 오로지 삶을 즐기는 데서 솟아나는 것”이라 일갈했다. 여자보다 아내와 엄마로 살아가는 삶을 즐길 수 있다면, 그 속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은 묻어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