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두 번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다. 칭얼대는 아이가 원하는 건 보호자의 관심이다. 연로한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관심을 받지 못하면 그들만의 방식으로 심술궂은 몽니를 부리게 된다.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내원한 70대 할머니. 1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줄곧 잠을 못 자고 식욕도 떨어져 전신이 쇠약해졌다. 할머니는 “갑자기 눈이 어두워지고 입도 바싹바싹 타들어간다”며 “이 모든 게 할아버지 묏자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원래 봐둔 묏자리를 지관이 풍수가 나쁘다고 해서 급히 다른 지역으로 변경한 뒤 장례를 마쳤다. 그 뒤로 할머니는 묏자리에 대한 미련과 후회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검사도 받고 입원도 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 신경안정제를 먹고 있지만 온통 묏자리 생각에 우울하다. 할머니는 “지금이라도 이장을 해야 하나 고민”이라며 “내 몸이 이렇게 나빠진 것도 묏자리가 안 좋아서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와서 묘를 이장하는 것도 쉽지 않은 터라 자식들도 큰 고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례의식은 죽은 자보다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 제삿밥을 실제 먹으러 올지, 땅속에 묻힌 이가 묏자리를 불편해할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남겨진 이들의 마음이 문제다. 할머니 역시 “살아계실 때 더 못해드린 게 내내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그래서 묏자리를 재고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성대한 장례와 더 좋은 묏자리는 고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데 더 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남편 사망 이후 가족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발언권 축소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원인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지만 정승이 죽으면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할머니는 이제 정승 집 부인 신세나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푸대접하는 뒷방 늙은이 처지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다.
할머니의 무의식은 하늘나라로 간 할아버지 걱정보다, 묏자리를 명분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것이다. 전신 쇠약이 심해 보약을 권하자, 할머니는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보호자인 아들 내외가 처방을 거듭 부탁하는데도 한참을 거부했다. 몸의 불편보다 자식들로부터 관심과 어른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몸이 빨리 나아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한때 나라를 주무르던 전직 대통령들이 퇴임 후 몽니를 부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인들 역시 한 가정 내에서 자신의 입지와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욕구는 필사적이다.
죽을 때까지 유산 상속을 미루고 재산으로 자식을 옥죄려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경우 그런 몸부림이 결국 묏자리에 대한 강박적 불안과 전신쇠약증으로 이어진 것이다.
악다구니를 쓰는 아이를 윽박질러선 고치기 어렵다. 노인의 몽니 역시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다. 자신이 가정 내 최고 어른임을 느끼도록 안심시켜야 한다. 아들 내외에게 집안 대소사를 결정할 때 할머니도 항상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견대로 다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죽을 날 받아놓은 퇴물 취급이 아니라, 가족의 일원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식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잠자코 따라오시라’는 태도는 노부모를 몽니쟁이로 만든다.
두 달 뒤 할머니는 “한약을 먹었더니 신기하게 묏자리 생각도 덜해졌다”며 많이 호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송강 정철은 ‘늙은 것도 서러운데 짐조차 지시려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짐만 덜어드려야지 관심이나 의사결정권까지 빼앗는 것은 노인을 더 서럽게 만든다. 노인들은 물질적 봉양을 받는 것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게 더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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