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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한방춘추

가장 미운 ‘남의 편’은 체면에 억압된 자기 자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이를 방관하거나 미온적으로 대처하는 남편은 더더욱 밉다. 그래서 ‘남편’은 ‘내편’의 반대말 즉 ‘남의 편’이라고도 한다.

갑자기 불안해지면 온 정신이 왼쪽 종아리로만 간다는 60대 여성. 10여년 전 상처가 곪아 고름을 빼냈던 부위다. 당시 간단히 치유되었고 재발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이 시작되면 온통 머릿속은 종아리 생각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자상한 남편조차 ‘희한한 병’이라며 타박만 했다.

이런 우울, 불안, 강박 증세는 무의식에 고착된 과거의 상처가 원인으로 환자의 심신이 지칠 즈음 드러난다. 이번에는 명절 음식 장만을 하던 도중 증상이 심하게 찾아왔다. ‘하루종일 죽을 것 같았다’며 심한 공포감까지 호소했다. 가족갈등도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왜 하필 명절음식 준비 중에 발병했을까. 우연이란 없다. 이번 명절에 만날 사람 중에 큰 상처를 준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자, 그제야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래전 시누이의 폭언과 멱살잡이에 내동댕이쳐졌던 기억부터 떠올렸다. 특히 남편이 시누이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환자의 손만 끌고 나왔다는 대목에선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내내 남편이 야속해 서럽게 울었다”고 회상하면서도 “이제는 아무런 원망도 없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킨 시어머니에서부터 환자의 전셋집까지 몰래 팔아버렸던 시아버지,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눈칫밥을 먹던 어린 시절을 온통 공포감으로 떨게 만들었던 외삼촌 내외까지. 수십 년도 지난 상처를 고스란히 떠올리면서도 환자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로만 일관했다. 오히려 상처 준 이들을 다 이해한다는 식으로 애써 포장하려 했다.

누군가에겐 반가운 명절이지만 환자의 마음은 분명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가면 환자는 시아버지의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다시 만나야 한다. 게다가 지금 힘들게 마련한 음식은 시누이가 고스란히 가져갈 것이다. 큰며느리도 아닌데 제사와 명절 뒤치다꺼리까지 혼자 떠맡은 상황이다. 환자의 무의식은 며칠 뒤 명절에 닥쳐올 현실의 두려움을 직감하고 거부감을 신체반응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기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숨어있다.

문제는 번번이 억압하고 부정하려고만 하는 태도다. 그럴수록 증상은 더 심해진다. 부당하게 맞으면 맞받아 때려주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이다. 이런 본성이 자신의 마음속엔 없다고 착각하며 한평생 살다보니 어려운 병에 시달렸던 것이다.

더 이상 제사를 맡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다. 그러자 환자는 불필요한 양심에 또 망설였다. 정 마음에 걸린다면 매일 나가는 성당에서 기도하길 권했다. 365일 제사를 지내는 셈이다. 공자도 예는 사치하기보다 차라리 검소함이 낫고, 상(喪)은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함이 낫다 하였으니, 꼭 제사상의 형식보다야 기도의 경건함과 내용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양심과 체면에 억압된 상처를 반복적으로 해소함으로써 환자의 증상은 차도를 보였다. 어쩌면 육십 평생 환자에게 가장 미운 남의 편은 시댁식구도 남편도 아닌, 당연한 감정조차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