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왜 재물에 더 집착하게 될까. 먹을 것이 풍족하고 배부른데 왜 더 먹으려 할까. 경제나 생물학적 논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상의학에선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겁과 공포를 물질로 회피해보려는 탐인(貪人)의 마음으로 풀이한다.
거식증으로 내원한 여고생. 165㎝에 40㎏이 채 되지 않고 온몸이 깡말랐다. 탈모에 피부노화가 심해져 10대 후반으로 보이지 않는다. 배가 불러 더 이상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여도 멈출 수가 없다. 배가 아파도 계속 밀어넣다가 급기야 토하길 반복한다. 1년째 생리가 끊겼고 수족냉증이 심해져 여름에도 추위를 타고 양말과 긴 옷을 입어야 한다.
흔히 거식증은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잘못된 다이어트 후유증으로 발생한다. 환자 역시 10대 초반에 통통했었고 비만에 대한 불안감이 늘 있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 원인이다.
환자의 폭식은 해외유학을 떠난 뒤 시작됐다. 성적이 썩 좋지 않다고 판단한 아버지의 권유로 고1 때 홀로 유학을 떠나야했다. 그런데, 외국인 하숙집 주인조차 “살을 좀 빼라”며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피자나 과자를 사다가 몰래 허겁지겁 먹는 일이 반복되었다. 환자의 체질은 태음인. 환경에 적응이 느린 유형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낯선 곳에서 냉대까지 받다보니 불안과 긴장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회피 반응이 폭식증과 거식증으로 이어졌다. 결국, 환자는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와서도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이 계속 불안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환자는 아버지의 말이라면 “싫다/좋다”는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끌려가는 성향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실패 이후 인격적으로 더욱 거칠어졌고 환자에겐 유학생활과 같이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처럼 거식증은 식이장애 이면에 불안과 공포심이 존재한다. 때로는 실연의 상처가, 때로는 취업불안, 성적저하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한다. 환자의 경우 강박적인 아버지나 냉정한 하숙집 주인, 해외유학, 낯선 곳 등은 무의식적으로 공포와 동일시되는 대상이다.
기초대사량을 높이고 폭식으로 늘어난 위를 조여주는 한약을 처방했다. 자연스럽게 음식이 덜 먹히도록 했다. 대신, 먹고 싶은 양질의 음식은 적당히 배부를 때까지 먹도록 했다. 매끼니 식단표대로만 먹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장 영양균형은 몰라도 식이요법 자체가 다른 억압으로 받아들여져 좋지 않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신뢰회복이 관건이다. 공포나 불안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서 더 증폭된다. 하늘이 재앙을 만들면 피할 수 있으나, 스스로 재앙을 만들면 도망갈 곳이 없다.더 이상 마음의 도피를 위해 폭식할 필요가 없음을 느껴야 비로소 치유된다. 환자는 2개월 여의 치료로 폭식과 거식증이 해소되었다.
‘음식은 때에 맞게 먹고, 재물은 예에 맞게 사용하는 것(食之以時 用之以禮)’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필요 이상 더 먹고 더 쌓아두고 싶다면 그건 공포나 불안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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