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박정희의 대결은 끝나지 않았다
11.13 전태일 분신
"국가가 한 젊은이의 일자리를 막는 것도 큰 죄악입니다."
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참여했던 운동권 대학생 출신 이명박이 1965년 시위 전력으로 취업이 어려워지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는 편지다. 그 덕분인지 이명박은 현대건설에 입사해 회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성공 신화를 써 나가게 되었다.
4년 뒤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청년 전태일이 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저희들은 근로기준법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여 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 1개월에 첫 주일과 셋째 주일, 2일은 쉽니다. 이런 휴식으로서는 아무리 강한 육체라도 곧 쇠퇴해버립니다. 하루속히 신체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해주십시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전태일은 이 편지를 보내지 못했고, 지역 노동청에 기업들의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지만 기다리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자 전태일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옅은 잿빛구름이 하늘을 우중충하게 뒤덮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서울 음대로 들어가는 골목 평화시장 입구의 사람들 틈에 서 있던 한 청년의 옷깃에서 검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
청년이 눈을 부릅뜬 채 벌떡 드러누웠다 일어섰다 하는 동작을 세 번 하는 동안 그의 동료인 듯한 청년 5, 6명이 쏜살같이 뛰어나와 잠바를 찢어내고 소화기를 뿜어대 불길을 잡았다. 불길이 오른 지 약 4분가량이 지난 뒤였다.
이미 이 청년의 눈썹과 머리털은 타버렸거나 그을려 있었으며 얼굴은 그을음과 불길로 새까맣게 뒤범벅이 돼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쏘는 듯한 빛을 내면서 허옇게 번쩍이고 있었다.
청년이 허덕거리던 숨을 잡고 약간 비틀거리는 상체를 가누면서 짐승의 울음 같은 것이 섞인 목소리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시간을 단축하라!", "일요일은 쉬게 해 달라!"고 처음으로 입을 열고 외치기 시작했다. (강성재, <르뽀 - 그 후의 평화시장>, <신동아> 1971년 3월호)
전태일이 박정희에게 쓴 편지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으로 박정희는 전태일을 알게 되었다. 그 대답으로 이듬해 연두교서에서 그동안 소홀히 다루던 노동 문제를 일곱 번째 항목에 포함시켜 이렇게 말했다.
"근로자들의 노동 조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관심을 갖고 다뤄야 한다. 첫째는 근로자의 노동 환경과 복지 향상 문제이고, 둘째는 노동 환경·복지 향상도 중요시하면서 경제 발전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다. (……) 임금의 높은 상승률은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축시킨다. 또한 제품의 국제경쟁률을 약화시킨다. 그 경우 피해는 기업가만이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간다. 근로자의 복지를 기업의 생산과 함께 점진적으로 향상시켜 나갈 작정이다." (강성재, 앞의 글)
발언의 행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박정희는 전태일의 죽음이 가져올 파장을 예상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 방침을 이미 마음속으로 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을 간신히 누르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이듬해 노동운동을 포함한 모든 진보적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전태일의 소박한 바람과는 180도 역행하는 길을 택했던 박정희의 말로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비참했다. 모든 것을 역사의 평가에 맡기고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했던 그에 대해 역사는 노동자와 민주주의의 적이었다는 준엄한 심판을 내렸다.
▲ 2013년 11월 10일, 전태일 동상 앞에 선 노동자
이날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자들은 마무리 집회를 하기 위해 전태일 다리에 모였다.
이명박의 편지, 부치지 못한 전태일의 편지
민주화를 갈구하던 한국인은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전태일의 후예인 노동자들은 그해 7, 8, 9월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쟁취한 뒤 그 힘을 하나로 모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결성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박정희의 망령은 지하에 봉인되고 전태일의 혼은 부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태일과 박정희의 역사적 대결은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게 아니었나 보다. 2007년 두 명의 박정희 후계자가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다. 한 명은 전태일과 달리 박정희에게 편지를 쓰고 나서 승승장구해 재벌의 반열에 올라선 이명박이고, 다른 한 명은 전태일이 박정희에게 편지를 쓸 때 청계천 여성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과 똑같은 열여덟 소녀였던 박근혜였다.
이 가운데 먼저 대권을 쥔 이명박은 박정희와 닮은 외모를 과시하며 박정희 시대의 성장 위주 개발 정책을 구사해 우리 시대의 전태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투신하며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죽음 위에서 꽃핀 노동운동은 허약하지 않았다. 2011년 309일간의 크레인 고공 농성 끝에 만세를 부르며 내려와 지지자들의 품에 안긴 김진숙의 모습은 '죽지 않는 전태일'의 존재를 모든 한국인에게 각인시켰다. 반면 이명박은 친인척 비리와 4대강 개발, 자원 외교, 내곡동 사저 등을 둘러싼 의혹에 휩싸인 채 권좌에서 내려와 역사의 심판은 물론 법의 심판도 받을지 모르는 처지에 몰려 있다.
이명박의 실패를 의식한 박근혜는 소외 계층을 감싸 안는 제스처를 취하며 대권에 도전했다. 복지, 경제 민주화 등 전통적으로 민주 세력의 몫으로 여겨졌던 정책을 선제적으로 제시하고, 아버지의 역사적 라이벌인 전태일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2012년 8월 28일에는 전태일 재단을 방문하고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에서 전태일 상에 헌화하려다가 유족들의 거부와 시민운동가들의 저지로 무산되기도 했다. 그래도 박근혜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고 곁에 있던 김준용 국민노조총연맹 자문위원에게 노동자가 행복한 나라를 꼭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죽지 않는 전태일들'에게 전쟁 선포한 박근혜의 무모함
치열한 선거전 끝에 그가 대통령에 당선했을 때 나는 프레시안으로부터 당선인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묻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전태일 평전>을 꼼꼼히 읽고 오늘날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는 취지의 대답을 했다. (당시 기사 : "박근혜 대통령, 박정희는 버리고 전태일을 품어라!") 지금 와서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보니 박 대통령이 그 인터뷰를 보지는 않았겠지만 <전태일 평전>은 읽은 것 같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박정희와 전태일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화해하기 어려운 사이인지,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하는 데 전태일의 후예들이 얼마나 걸림돌이 될 것인지 절감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선거가 끝난 지 1년도 안 되어 그토록 쉽게 전태일 다리에서 한 약속과 복지 공약을 내던지고 교사들의 노동조합을 합법의 테두리 밖으로 내몰며 10만이 넘는 공무원 노동자들을 공격할 리가 있겠는가?
박근혜 정부는 '화해'와 '복지'의 코드로 박정희와 전태일을 화해시켜 박정희의 명예를 회복하는 어려운 길 대신에 둘의 역사적 대결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현실적인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안 그래도 힘겨운 세월을 헤쳐 온 오늘의 전태일들에게는 더욱더 험난한 역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난 2013년 11월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를 본 느낌을 말하자면, 박근혜 정부의 선택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무모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날 신승철 민주노총 위원장과 조합원들은 노조 설립신고서를 찢는 장면을 연출하고 반정부, 반재벌 투쟁을 선언했다. 이 대회의 정식 명칭은 '민주주의 파괴 중단! 노동 탄압 분쇄!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2013년 전국노동자대회'였다. '열사'는 대개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을 가리킨다. 전태일 이후에도 참 많은 노동자들이 가슴 아프게 열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날 내가 서울광장에서 본 것은 '죽지 않는 전태일들'이었다. 박정희를 부활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전태일이 살아 숨 쉬며 자기 손으로 전태일의 뜻을 관철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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