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의 교훈, 대중을 외면하면 진보도 없다
11.6 러시아혁명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3.1운동 이듬해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1917년의 러시아혁명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여러 민족의 자유와 자결을 선포했으며 세계 개조의 첫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했다. 이 혁명을 통해 종래의 극단적 침략국가가 이제 극단적 공화국가가 되었다면서, 천지의 대변화가 일어났으니 한국도 활발히 맹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혁명을 사회주의자도 아닌 박은식이 왜 이렇게 찬양했을까? 러시아는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의 가장 큰 근심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부동항을 찾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북국의 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1904년 러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한국인이 러시아에 맞서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을 지켜 주겠다는 일본의 약속을 믿고 일본의 승리를 기원했을까? 그랬던 침략 국가 러시아가 돌연 혁명을 일으켜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를 애호하며 민족 해방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사납던 제국주의 국가의 놀라운 변신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던 동양의 민족주의자에게도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박은식이 2대 임시대통령을 지낸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러시아혁명을 통해 등장한 사회주의 정부에 지지를 표명했다.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은 논설에서 1919년 하반기부터 1920년 상반기에 걸쳐 사회주의를 소개하고 그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하영선, <한국 외교사와 국제 정치학>).
혁명 러시아는 임시정부 등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지지를 표명하고 현금 지원을 포함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민족근로자대회에 참가한 여운형, 김규식은 코민테른 의장인 지노비예프와 함께 대회의 공동 의장을 맡는가 하면, 레닌을 만나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미국, 영국 등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전후 국제관계를 조율하던 파리강화회의(1919~1920)나 워싱턴회의(1921~1922)에 파견된 우리 대표들이 문전박대 당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레닌과 스탈린 분장을 하고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
피에로 같기는 하지만 러시아혁명의 주역들이 대중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히지는 않은 것 같다.
민족주의 독립운동가가 러시아혁명을 지지한 이유
러시아혁명을 지지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그렇다 치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왜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도 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을까?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독일과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막대한 전비(戰費)가 지출되는 가운데 물가는 치솟고 노동자, 농민, 병사 대중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이러한 대중의 불만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전광석화처럼 사회주의 혁명을 밀어붙였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그들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과 달랐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했으나,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 열강에 비하면 후진국이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혁명 러시아의 입지가 매우 불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에 굴욕적 양보도 불사하며 평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벗어나 체제 안정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미국, 영국, 일본 등 자본주의 국가들은 러시아혁명을 뒤집기 위해 치열한 간섭전쟁을 벌였다. 시련에 맞닥뜨린 볼셰비키는 독일과 같은 서유럽 선진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국제적 연대가 형성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은 용감히 싸워 간섭을 물리치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건설했지만, 고대하던 서유럽의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립에 처한 소련은 시선을 동방으로 돌렸다. 그곳은 사회주의의 전제라는 자본주의조차 막 시작되는 단계였지만, 소련의 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민중이 있었다. 소련은 바로 그들과 손잡고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식민지 독립과 세계 평화를 내걸었다. 그때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연대를 뒷받침한 논리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이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에서 봉건 세력과 손잡고 자본주의 발전을 억압하므로 자주적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독립운동가들도 광범위한 반제국주의 전선의 동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국공합작과 한국의 민족유일당 운동은 모두 그러한 논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좌우 연대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식민지가 독립을 쟁취했고 몽골, 동유럽, 중국, 북한 등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생겨나 소련과 국제 연대를 형성했다. 자신감을 얻은 소련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동방의 여러 나라들이 자본주의를 건너뛰어 사회주의로 가는 발전 경로를 밟을 것으로 기대했다.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으며 자본주의의 고통을 맛본 구식민지 민중이 사회주의 직행을 원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를 '비자본주의적 발전'이라 하는데, 정치적으로 서구식 의회주의를 택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식 계획 경제를 택한 인도가 대표적인 모델로 보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 쿠바, 인도차이나 등이 공산화되면서 미국과 서유럽을 포위하는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연대의 꿈은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동방 민족이 자본주의를 건너뛰리라는 소련의 기대는 현실의 벽에 막히고 말았다. 상당수의 구식민지 국가들이 미국, 일본, 서유럽 등과 경제적 관계를 맺으면서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소련은 그러한 관계의 예속성에 주목해 이를 '신식민지'로 규정했지만, 예속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신생국들의 정체나 퇴보로 귀결되지 않고 도리어 급속한 자본주의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국,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등 아시아 4룡의 약진은 사회주의권에 충격을 안겼다. 오히려 베트남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절정에 이른 사회주의권의 경제가 바로 그 시기부터 침체에 빠진 것은 역사의 거대한 역설이었다.
1988년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에는 소련을 비롯한 중국,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가해 구식민지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리라던 자본주의적 발전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 충격이 그대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면 과장이겠지만, 서울 올림픽이 소련의 동방 정책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의 때늦은 시효 만료를 확인해 준 것만은 분명하다. 동방 피압박 민족과 연대해 서방에 대항하려던 소련의 꿈은 바로 그 동방의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무너지고 스스로 자본주의를 향한 역주행을 선택하고 말았다.
▲ 붉은광장의 노인 시위대와 무관심한 젊은이들.
대부분 사회주의 시절 열심히 일하고 안정적인 연금 생활을 기대하다 소련 해체와 초고공 인플레라는 날벼락을 맞은 노인들이다.
러시아혁명 정신은 의미를 잃지 않았다
2008년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의 자료를 살펴보려고 대형 서점에 들렀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책이 사회주의 시기를 쏙 빼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사회주의자들은 고국에서조차 잊혀 가고 있었다. 동유럽 출신 사회주의자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동유럽에서는 구공산당 세력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능숙한 첨병으로서라고 한다.
오늘날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러시아혁명의 의의를 부정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소련식 사회주의 모델을 부정하고 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1917년의 후진국 러시아에 비하면 당시의 '식민지 반봉건 사회' 한국은 오늘날 고도의 자본주의를 이룩해,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의 훌륭한 전제를 구축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 사회주의는커녕 모든 진보적 운동이 지지부진한 것은 과거에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해 이론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그러한 지체를 넘어 이곳에서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레닌이 말한 것처럼 후진국에서 탄생한 소련쯤은 우습게 여길 멋진 사회가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초반 박은식을 비롯한 전 세계의 진보 세력을 열광시킨 러시아혁명의 정신마저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 정신의 소유자들은 대중의 바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에게 정신 나간 짓으로 여겨졌던 봉기를 대중과 함께 성공시켰다. 요즘 시절이 하수상하다 보니 지젝 같은 이는 남미에서 공동체 운동을 하다 좌절하고 미국에서 자살한 구소련 외교관을 현 시기 사회주의자의 모델처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 음울한 사회주의를 따르느니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려는, 사회주의적이지는 않은 광범한 대중 운동에 동참하는 게 훨씬 더 건강할 것 같다.
대중을 원망하거나 외면하는 지식인은 사회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될 수 없다. 설령 그 대중이 지금 당장은 사회주의와 진보를 부정하고 외면하더라도.
(덧붙임) 1917년 11월 6일의 봉기로 시작된 러시아혁명은 '10월 혁명'으로도 불린다. 당시까지 러시아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에 따르면 이날은 10월 24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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