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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한방춘추

사무치는 억울함, 큰 병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상하고 만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 함께한 좋은 뜻도 시간이 지나면 그 뜻이 다하기 마련이다. 이 때 다한 뜻을 부여잡고 놓지 못하면 고통만 따른다.

불면증이 심해 수면제도 소용없다는 중년 여성. 백화점 판매사원인데 얼마 전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은 날부터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머리도 몽롱하다. 목과 가슴에는 뭔가 콱 걸린 것 같고, 식욕이 뚝 떨어져 1주일 사이 체중이 3㎏ 줄었다.

작년 대비 매출부진과 근무태만을 이유로 해고당했다는 그는 “아무리 비정규직이지만 4년씩이나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해고냐. 무슨 방법이 없느냐”며 한참을 억울함부터 호소했다.

화병형 불면증이다. 상처의 원인이 된 환경으로부터 ‘싸울지 도망갈지’를 빨리 결정해야 그나마 병이 심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환자는 억울한 생각을 곱씹고만 있다.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보다 “회사 비리라도 어떻게 터뜨려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면 소송에 휘말릴 텐데 혼자 감당할 준비는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소송은 몇 년이 갈지도 모르고 그 사이 경제적 불이익도 크지 않겠는가라고 지적했다. 환자는 화난 목소리로 “그럼 그런 나쁜 인간들을 용서하란 말인가”라며 흥분했다.

용서하란 말이 아니다. 용서는 내 분이 다 풀린 뒤에 해도 늦지 않다. 당장 마음에선 실컷 욕해도 좋다. 부처도 예수도 아닌데 어찌 용서부터 하겠는가. 다만, 내게 닥친 고통 중에 작은 쪽을 택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주워 담아야 가장 이익이 클까를 먼저 따져보라는 것뿐이다.

때로는 공익이나 명예를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며 긴 세월 소송에 매달리는 이들도 있다. 기꺼이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었다면 이것도 한 방법이다. 이 또한 양심을 지키고 억울함을 해소하려는 이익에 따른 선택이다. 그렇게 대가도 치르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화병은 덜해진다.

그러나 환자는 “유통업계는 소문이 빠르다”면서 한편으론 재취업도 벌써 걱정이다. 그렇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그러나 환자는 회사를 응징해 억울함도 풀고, 재취업에 불이익도 없었으면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다.

환자에게 해고는 일종의 사고다. 녹색 신호등을 보고 길을 건너도 부주의한 운전자의 차에 부딪힐 수 있다. 심지어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 평생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그것을 원망하며 주저앉는다면 이는 사고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다. 외부에서 날아온 제1의 화살이 아닌, 자신이 쏜 제2의 화살에 맞은 것이다.

법구경에 “악의 열매가 맺히기 전에는 악한 자도 복을 만난다, 선의 열매가 맺히기 전에는 선한 이도 이따금 화를 만난다”고 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오나’라며 억울함으로 불면의 나날을 보내면 더 큰 재앙이 된다.

환자는 “내 병이 회사 측 때문에 생긴 걸 입증할 진단서만 끊어 달라”며 치료는 받지 않았다. 얼마 뒤 처음보다 몸이 더 상한 채로 다시 내원했다. 그는 “처음엔 너무 억울해 원장님 말도 섭섭했지만, 몸이 더 아프고 다시 생각하니 다 맞는 말이었다”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고소·고발은 접고 직장도 새로 알아보기로 했다.

주역은 ‘뜻이 다하면 새롭게 하라’고 말한다.

맑고 투명했던 하늘의 뜻도 언젠간 고갈된 연못의 물처럼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어떤 결론이나 뜻도 영원한 건 없다.

인연이 다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발걸음도 가볍게 떠나야 한다. 그래서 늘 시작은 끝이고,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