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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한의학

영조, 뱃속 회충을 이렇게 길들였다! 소화기 냉증 치료하려 배꼽 뜸질 회충에 의한 상충(上衝·위로 치밀어 오름)감과 구역감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증상은 영조 20년에서 41년까지 이어진다. 회충을 치료하는 약물은 모두 매운 약이다. 위장의 온기를 올려 회충이 살 조건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처방이었다. 또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기 위해 한편으로는 뜸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영조도 자신의 건강상 약점이 소화기 냉증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제법(煉臍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연제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방식은 직접구가 아닌 간접구에 가깝다. 쑥뜸과 피부 표면 사이에 소금이나 약재를 넣어 열기가 피부에 직접 닿아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보는 지혜가 동서양에서 일치하는 것은 배꼽이다. .. 더보기
원조 '국민 약골' 영조, "오줌발이 약해서…" 영조는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 씨는 궁녀들의 여종인 무수리였다. 왕의 어머니라곤 상상하기 힘든 천한 신분을 딛고 영조는 출발점에 섰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상대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후 죽임을 당한 것은 숙빈 최 씨가 진실을 알린 덕분이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고 난 후 경종과 영조는 갈등 관계에 돌입한다.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할 터.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고리 권력'인 실세 환관 박상검과 영조 간에 불거진 갈등은 1인자와 2인자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불안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 더보기
원조 '국민 약골' 영조, "○○ 없인 못 살아!" 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52년 세월 동안 왕좌에 머문 영조(李衿·1694~1776년, 재위 1725∼1776년). 숙종의 둘째 아들이자 경종의 이복동생이었던 그는 탕평책을 통해 조선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한 왕이자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비정한 아버지라는 '두 얼굴'의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한평생 비천한 무수리(숙빈 최씨)의 자식이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산 불행한 임금이기도 했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달고 산 '국민 약골'이었다.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났고 소화 불량에 시달렸으며 복통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던 소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 더보기
정력제도 해결 못한 장희빈의 손자 욕망 후사 잇기 위한 정력제 경종은 죽을 때까지 후사가 없었다. 이복동생 연잉군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야사(野史)에는 폐비된 장옥정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경종)의 고환을 잡아당겨 고자로 만들었다는 설이 그럴듯하게 포장돼 있다. 경종은 9세 때 단의왕후와 혼인했고, 그녀가 죽고 나서 선의왕후와 재혼했을 뿐 단 한 명의 후궁도 두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다. 는 경종의 후사 문제를 한의학적 처방과 연결시켜 거론한다. 경종이 21세 되던 1708년, 즉 숙종 34년 2월 10일 는 임금이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후사를 위해 육미지황원과 팔미지황원을 처방했다고 썼다. 한의학에서는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이 양기, 즉 정력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소변이 자주 마렵다는 것과 정.. 더보기
게와 감으로 왕을 죽여? 경종 독살설의 진실 조선의 제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자 때부터 신변, 정치와 관련해 갖은 수난을 겪은 비운의 왕이었다. 32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년간 병치레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경종의 재임기는 소론과 노론이 세제(世弟·연잉군, 후일 영조) 책봉을 두고 피의 숙청(1, 2차 신임사화)을 벌인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해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지만 노론의 압박으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실록 곳곳에 경종의 "이상한 병"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이상한.. 더보기
조선 시대에 외과 수술? <마의> 백광현의 진실은… 현종과 마의 백광현 현종이 가장 많이 앓은 질환은 종기다. 드라마 의 백광현(1625~1697년 추정)은 현종 때 활약한 종기 치료 전문가다. 백광현은 실제로 말을 치료하는 마의(馬醫) 출신이며 현종 4년 각종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천한 신분인 마의로 출발해 현종의 종기를 치료함으로써 숙종 5년에 어의가 된 인물로, 종기 치료에 한 획을 그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종기 때문에 크게 고생한 현종이 '백태의(白太醫)'의 신화를 만든 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백광현이란 인물은 드라마처럼 현대 양방의 수술법을 쓰는 전설적 명의였을까. 숙종, 영조 때의 문장가였던 정내교(1681~1757년)가 지은 4권 중 '백태의전(白太醫傳)'은 백광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본디 말을 잘 치료했다. 오직 침을 써.. 더보기
효종 이어 현종도 독살? 진실은 이렇다! 완연한 봄, 전남 완도군 보길도엔 핏빛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또 졌다. 보길도는 효종이 죽은 후 대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피터지게 싸운 두 인물의 악연이 얽힌 곳이다. 이른바 예송 논쟁의 주역인 우암 송시열(1607~1689년)과 고산 윤선도(1587~1671년)가 그들이다. 남인의 선봉장 윤선도는 송시열이 이끌던 서인 세력에게 패해 유배됐다가 보길도에서 죽었고, 그를 유배 보낸 송시열은 꼭 18년 후 자신도 보길도로 유배된다. 보길도 바위 곳곳에는 송시열의 시가 남아 있다. 떨어져 잎으로 흩어지지 않고 붉은 꽃송이 뚝뚝 떨어지는 보길도 동백꽃의 자태는 당시 조선 민초들이 겪은 아픔을 증언하는 듯하다. 예송 논쟁은 효종과 효종 비 인선왕후 사후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 더보기
사라진 북벌의 꿈? 효종 독살의 진실은… 갈증과 열 식히는 蓮 효종 7년 4월 20일의 에는 효종의 증상을 확실하게 소갈로 보고 '맥문동음(麥門冬飮)'이라는 처방을 낸 기록도 있다. 은 소갈에 대해 "심장이 약해(心虛)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며, 가슴 속이 달아오르면서 답답하고 편치 않아 손발을 버둥거리는 증세(煩躁)가 나타나고, 목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고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규정하는데, 이는 효종이 기질상 보여주는 화병과 번열(煩熱), 구갈(口渴) 등의 증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에서 이런 소갈 증상에 주로 권유하는 약물은 연뿌리 즙 오미자 맥문동 천화분 인삼 등인데, 실제 효종에겐 연자죽과 연자육(蓮子肉)이 든 청심연자음, 양혈청화탕이 자주 처방됐다. 진흙탕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불교에선 청정한 불심(佛心)의 상.. 더보기
중국 치겠다던 효종, 감기에 굴복하다 조선 왕은 대부분 즉위하면서부터 상사(喪事)로 인해 건강에 타격을 입는다.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이들을 제외하면 조선의 모든 왕은 선대왕의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왕정을 시작했다. 충효(忠孝)가 국가 운영의 근본 가치였던 만큼 임금은 상사에 있어 백성의 모범이 돼야 했다. 문제는 선대왕의 장례 절차가 몸을 해칠 만큼 복잡하고 힘들었다는 점. 국왕 복식(服飾)을 하고 겨우 몇 시간 사극에 출연하는 연기자도 몸살이 날 지경인데, 3년상을 치른 조선의 허약한 왕은 오죽했겠는가. 체력 소모가 엄청났음은 불문가지. 오랜 상을 치르면서 임금의 몸은 계체량을 통과하기 위해 무리하게 살을 뺀 복서처럼 흐느적거렸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북벌론(北伐論)으로 잘 알려진 효종(李淏·1619~1659년)도 상사로 인.. 더보기
허준에게 짜증내는 왕 "약 쓰는 게 왜 이리 경솔해!" 이명과 편두통에 침을 선택 선조를 괴롭힌 가장 무서운 질환은 귀울음 곧 이명이었다. 증상은 즉위 28년 8월부터 시작돼 평생 동안 이어졌다. 에서 파악한 귀의 본질은 '공한(空閒)'이다. '고요함을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이 텅 비어 한가함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음이 번뇌로 가득 차거나 화가 뻗치면 귀에 병이 생긴다. 귀는 고요하면서 차가운 기관이다. 우리가 뜨거운 불에 손을 데면 반사적으로 귓바퀴를 잡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포영화에 소리가 없으면 무덤덤해지듯 귀는 어둡고 차가운 공포를 주관하는 곳이다. 생긴 모양도 외부는 넓고 내부로 갈수록 좁아진다. 소리를 모으기 좋게 생겼다. 그래서 한의학은 귀를 구심성(求心性)의 음적(陰的) 기관이라 규정한다. 한의학에서 뜨겁고 팽창하는 힘은 화(火)이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