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등지고 서리로 몸을 녹이려는 격이다.”
최상의 행복이라도 익숙해지면, 어리석게도 더 탐나는 걸 그리워하는 인간의 속성을 괴테는 이렇게 비유했다. 괴테는 또 부유한 가운데 결핍을 느낀다는 건 인간의 고통 중 가장 혹독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후우울증으로 내원한 여성. 결혼 후 대학원을 그만두고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비교적 잘 지내왔다. 그런데 최근들어 “하루하루 왜 사는지, 아이를 봐도 예쁜 줄을 모르겠다”고 했다. 원래 마른 체형인데 식욕저하로 체중은 더 줄고 불면증까지 왔다.
대한민국 여성의 70~80%가 경험한다는 산후우울증. 출산과 육아는 고스란히 여성의 몫이며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탓에 간과되는 경향이 높다. 그런데 환자의 산후우울증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남편은 “얼마 전 아내가 대학동창의 연주회를 다녀온 뒤부터 증상이 심해졌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환자는 그 친구보다 성적이나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출중했는데 전업주부가 되면서 음악을 포기한 상황이다. 그런데 부유한 시댁을 둔 친구는 결혼 후에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잘 알던 친구가 나를 앞서가는 것은 누구든 참기 어렵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 여겼던 친구의 작은 성공에 박수만 치긴 쉽지 않다. 인격이 낮아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보편적인 심리다.
특히 환자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서열의식이 강한 소음인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사상의학에서는 이를 소음인 ‘제심(悌心)’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정리하는 기질이 극히 강해, 항상 우열을 가려놓으려 한다. 능력이나 외모는 물론이고 심지어 믿을 만한 정도도 순위나 퍼센트로 정하려 든다.
위아래 서열을 정하고 자신보다 윗사람은 맹목적일 만큼 깍듯하게 인정하지만, 자신보다 능력이 떨어지거나 아랫사람은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심리다. 이제 위아래가 뒤바뀌었다고 여겨지는 친구의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산후우울증을 더 심하게 만든 것이다.
“언제 아이를 다 키우고 내 생활을 가질지 생각하면 막막하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 “친구는 다 가진 것 같더냐”고 물었다. 환자는 “아직 아이도 갖지 못했고, 남편 벌이로는 부족한 생활비를 시댁에서 보조받느라 이래저래 눈치보며 살더라”고 답했다.
환자에게 자신이 친구보다 무엇을 더 가졌는지 하나씩 돌아보게 하는 방향으로 면담치료를 했다. 아울러 우울증약 대신 체력을 강화하는 한약을 처방했다. 소음인은 체력이 떨어지면 열등한 감정기능을 그대로 드러내 짜증이 더 많아진다. 남편과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염되어 악순환된다. 체력적으로 덜 지쳐야 그나마 짜증도 줄고 활력도 생긴다.
남편에게는 아내가 가장 힘든 고비를 넘고 있는 만큼, 아내가 스스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애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친 아내가 잠부터 푹 자도록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자는 것도 좋은 외조라고 말해줬다.
승승장구만 할 순 없기에 우울이라는 검은 그림자는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나 이를 걷어낼 묘약 역시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그 약은 당연한 듯 누려온 것들 속에 많은 기적이 깃들어 있음을 하나씩 돌아보는 것이다. 작고 낮은 시선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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