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한 탓에 비만했다. 즉위년 10월 9일 태종은 유시(諭示)한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
살찌고 무겁다는 건 사실이었다. 일부 역사 연구가들은 세종이 대단한 대식가이고 살이 쪄서 소갈(消渴)증이라는 당뇨 증상을 앓았다고 주장하지만, 글의 의미를 짚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드는 예는 태종이 "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에도 권도를 좇아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도록 하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실제로 허손(虛損)의 병에 걸려 대신들이 고기 들기를 권했다. 허손은 피로가 극심해 생기는 질병이다. <황제내경>에선 허손을 이렇게 규정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몸의 원기가 줄어들고 음식물의 기가 부족해져서 상초(上焦)가 잘 작용하지 못하며, 하완(下脘)이 통하지 못하므로 속의 위기가 더워지면서 그 열기가 가슴을 훈증시키기 때문에 속에서 열이 난다."
세종 4년 임금이 허손 병을 앓은 지 여러 달이 지났다.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의 효험이 없었다. 태종의 상중에 고기 없는 소찬만 여러 달 먹다 보니 음식물의 기가 부족해져 생긴 증상이었다. 대식가여서 고기를 많이 먹다 며칠 굶어 고기를 찾은 게 아니라 상중이어서 고기를 절제한 게 여러 달 되다 보니 원기를 보충할 목적으로 권한 게 진실인 것이다. 덧붙이는 세종의 말은 대식가라는 가설과 거리가 멀다.
"내가 본디 병이 없고 늙지도 어리지도 않으니 어찌 감히 뒷날에 병이 날까봐 고기를 먹겠느냐."
세종은 재위 초반까지만 해도 건강에 자신이 있었지만 29세였던 재위 7년에 이르자 관을 짜서 준비할 정도로 심한 병에 걸린다. 세종 31년 11월 15일 기록은 당시 상황을 재론한다.
"임금이 을사년에 병이 심하여 외간에서 관곽을 짜기까지 했는데 아직까지 무슨 병인지 모른다."
이는 세종 7년 7월 29일 임금이 몸이 불편해 여러 종친관이 정부 육조에서 문안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윤(閏) 7월 10일엔 두통과 이질을 앓았는데 7월 19일 중국 사신들이 들어와 임금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빛이 파리하고 검게 변해 있어 병환이 심했다고 한다.
이때 진찰한 사람은 요동의원 하양이다. 진찰 결과는 이렇다.
"전하의 병환이 상부는 성하고, 하부가 허한 것은 정신적으로 과로한 때문이다. 그래서 맥이 (한 번 호흡하는 동안에) 4번씩 뛰어 평화한 맥과 같은 듯하나, 오른쪽 맥은 침(沈)하면서 활하고, 왼쪽 맥은 침하면서 허하다. 담(痰)이 가슴 사이에 쌓여 기운이 유통하지 못하고 수화(水火)가 오르내리지 못하니, 먼저 소담할 약을 복용하고 다음에 비위를 온화하게 할 약을 복용하고 조리할 약을 진어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진찰한 하양은 향사칠기탕(香砂七氣湯)과 양격도담탕(涼膈導痰湯)을 합제(合劑)한 방문을 냈다.
심리적 火가 원인
재위 초반 인간으로서의 세종은 불행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는 물론이고, 외삼촌들의 떼죽음, 장인 심온의 죽음과 장모의 노비 전락은 엄청난 인간적 고뇌를 떠안아야 하는 고통이었다. 국상(國喪)의 장례식은 과로의 연속이었다. 3일장도 힘들다고 하는 판에 3년상을 치르는 건 엄청난 고역이다.
세종은 정종과 원경왕후, 태종에 이르기까지 국상을 거의 연속으로 치렀다. 상례의 고단함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평민들이 만사를 제쳐놓고 상제를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한다. 전하께서 소찬만 잡수시고 국정을 돌보면서 3년의 상제를 마치고자 한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다."
대신들의 건의가 있은 게 재위 4년, 병이 난 시점이 재위 7년인 점을 감안하면 발병이 상례 끝에 맞춰진 셈이다.
세종은 유별나게 성실했다. 실록은 이렇게 적었다.
"즉위함에 미쳐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를 행하고 다음 경연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게으르지 않았다."
향사칠기탕이나 양격도담탕은 심리적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처방이다. 게다가 맥상이 침(沈)한 것은 원기가 쇠약해졌다는 증거다. 관을 짤 정도의 질병 이후 세종은 계속적으로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
세종의 '소갈'은 당뇨인가?
소갈증과 안질은 세종이 가장 자주 호소한 질병이다. 소갈은 현대 의학의 당뇨와 연관해 생각하기 쉽지만 한의학에선 소갈을 소갈(消渴), 소중(消中), 소신(消腎)의 3가지로 나눈다. 소갈은 세종 재위 13년 3월 중국에 갈증을 없앨 약을 문의할 정도로 심했다.
재위 21년 세종은 하루에 마시는 물이 어찌 한 동이만 되겠느냐고 탄식한다. 소갈을 없앨 목적으로 처방한 음식은 흰 장닭, 누런 암꿩, 양고기다. 닭은 본래 삼계탕에 들어갈 정도로 속을 데우는 음식이고 꿩은 신맛이 있는 음식으로 갈증을 없애는 효능이 있다.
한의학의 논리로 보면, 양고기는 인체의 모든 곳에서 양적인 힘을 북돋워준다. 특히 시력과 청력, 폐의 호흡 능력을 키우는 데 효과가 있다. 사실 염소의 눈은 초점이 없는 원시다. 멀리 보는 능력이 강하다. 멀리 밝히는 양적인 힘이 크다는 데 특징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시력을 좋게 하는 데는 양의 간으로 만든 '양간환'이 좋다고 <동의보감>에 나와 있을 정도다.
한의학은 질환에 좋은 음식을 추천하기보다 환자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추천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은 몸이 차고 냉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앞에서 본 추천 음식이 모두 온기를 돋우는 음식이라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풍질(風疾), 풍습(風濕) 등 관절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번 온천을 갔고, 그때마다 효험이 컸다고 한다. 술은 특히 체온을 끌어올려 냉기를 없애는 중요한 약으로 쓰였는데 이직 등이 세종의 풍랭통을 치료하려고 강권한 점은 중요한 방증이다.
<동의보감>은 소갈을 이렇게 정의한다.
"심장의 기운이 약해져 열기가 올라오는 것을 적절히 발산하지 못하면 가슴속이 답답해지고 입술이 붉어진다. 이렇게 된 사람은 목이 말라 물을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는데 양은 적다. 이런 증상을 격소라고 하는데 백호가인삼탕이 좋다."
소변을 자주 보고 시원하지 않은 증상은 임질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에 대해 "심신의 기운이 하초에 몰려 오줌길이 꽉 막혀 까무러치거나 찔끔찔끔 그치지 않고 나온다"고 풀이했다. 일부 호사가들이 말하는 염증성으로 생기는 성병 후유증이 아니라 신경을 쓰거나 체력이 떨어지면서 물총처럼 소변을 짜내는 힘이 떨어져 아랫배 근육이 켕기는 증상을 말한다. 실제로 세종이 말을 타고 능을 다녀온 후, 자신이 말고삐를 잡고 움직일 때와 다른 사람이 고삐를 잡았을 때를 비교해 말고삐를 놓고 움직일 땐 임질 증상이 없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피로감이 원인인 임질이었다.
요동의원 하양의 진찰을 받고 세종 자신이 원민생이라는 사람을 통해 물어본 처방은 죽엽석고탕이다. 백호탕이나 죽엽석고탕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약물은 석고다. 석고는 하얀색 때문에 백호로 불리는데 열을 꺾는 강렬한 약성이 호랑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간적 고뇌를 비롯한 번민은 모두 화(火)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심리적 화가 바로 소갈을 유발한 가장 큰 원인이다. 정신이 고뇌를 승화해 인격적 완성은 이뤘을지 몰라도 신체가 받아야 할 부담은 소갈증이 된 것이다.
'醫學 > 낮은 한의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명회의 압구정 기생놀음에 까칠한 성종은… (0) | 2014.02.15 |
---|---|
세종의 죽음, 진실은 이렇다! (0) | 2014.02.14 |
세종은 왜 무당의 푸닥거리에 집착했나? (0) | 2014.02.11 |
중종은 어떻게 조광조를 죽였나? (0) | 2014.02.10 |
복통 호소하는 왕, 대장금의 화끈한 처방은… (0) | 2014.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