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4대 왕 세종(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은 인간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인권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라도 인간적 처우를 해야 한다는 인권주의자였다. 죄수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해 온옥(溫獄)을 만들라고 형조에 명을 내릴 정도였다.
간통의 경우에도 처벌 위주가 아니라 인간적 차원에서 적절한 형벌만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15년 12월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윤수(尹須)·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위로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감동·금동·연생 등(의 유사한 사건)이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갓 법령만으로 방지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에 대한 연민
조선의 이념인 유학은 질병이나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철저히 내면을 성찰하고 욕망을 억제해 마음을 닦도록 요구했다. 양심(養心)이나 수심(修心)의 방식으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라는 도덕적 메시지였다. 하지만 종교나 무속은 다르다. 불가항력적인 재앙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정서적 위안, 안심(安心)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보통 사람이었다. 특히 질병 치료에선 사대부와 유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사찰에 가서 약사불(藥師佛)에 비는 건 물론, 도가의 기문둔갑술을 쓰고 무당의 푸닥거리로 질병을 치료하려 했다.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원경왕후의 불화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의 외삼촌 민무구·민무질·민무휼·민무회 사형제를 죽였고, 한술 더 떠 후궁들과 여성 편력을 일삼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대립은 어린 세종에게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더 깊게 했다.
세종 2년 5월 27일 원경왕후는 학질을 앓았다. 태종은 질병의 원인을 담담히 설명한다.
"성녕대군(태종의 4남)이 죽은 뒤부터 상심하고 슬퍼하며 먹지를 않더니 오늘에 이르러 학질에 걸렸다."
실록은 이후 세종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세종은 궁궐을 비우고 국정을 내팽개친 채 어머니 간호에만 집중한다. 실록은 다만 행선지에 대해선 언급했다. 개경사라는 절에 머물다 오부, 최전의 집에 머물고 이궁(離宮) 남교(南郊) 풀밭에서 지내는가 하면 갈마골 박고의 집, 송계원 냇가, 선암 동소문, 곽승우 이맹유의 집 등으로 옮긴다.
'학을 뗀다'는 옛말이 이런 이상한 행동에 대한 해답이다. 세종은 학질을 떼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머문 것이다. 태종은 이에 대해 분명히 언급한다.
"내가 대비와 주상의 간 곳을 몰랐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주상이 대비의 학질을 근심하여 몸소 필부의 행동을 친히 하여 단마(單馬)로써 환자 두 사람만을 데리고 대비를 모시고 나가 피하여 병 떼기를 꾀하니 그 효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문제는 치료 방법이었다. 실록은 덧붙인다.
"6월 6일 임금과 양녕, 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개경사에서 피병할 때 술사둔갑법(術士遁甲法)을 써서 시위를 다 물리치고 밤에 환관 2인, 시녀 5인, 내노 14인만 데리고 대비를 견여(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는 가마)로써 모시어 곧 개경사로 향하니 밤이 삼경이라 절에 가까이 이르러 임금이 다만 한 사람만 데리고 먼저 본사에 가서 있을 방을 깨끗이 쓸고 돌아와 대비를 맞아 절에 머문 지 사흘이 되도록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6월 11일엔 도류승 14인을 모아 도지정근(桃枝精勤)을 베풀었는데, 이는 복숭아 가지를 잡고 기도하는 도교 의식이었다. 6월 14일엔 아예 무당을 시켜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학질이 낫기를 기원했다.
세종이 안타깝게 병구완을 했지만 대비는 학질을 세 번 반복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임금이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수일이었으며, 머리 풀고 발 벗고 부르짖어 통곡했다고 그 슬픔을 기록했다. 의약과 무속, 불교 사이에서 당연히 이성적 선택을 할 것으로 보인 세종도 어머니의 학질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선 무속에 더 집착한 보통의 남자였다.
치료 위해 불교, 무속 집착
세종의 무속에 대한 집착은 재위 후에도 계속되었다. 결국, 세종 20년 사간원에서 푸닥거리를 중지할 것을 간언한다.
"전번에 거동하시다가 환궁하시던 날에 신들린 무당으로 하여금 길옆에서 음사를 베풀어 대소신료들이 보고 듣는 것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종의 반응은 되레 한술 더 뜬다.
"그렇다. 본궁에서 베푸는 음사가 매우 많았으므로 이후로는 마땅히 은밀한 곳에서 행하게 할 것이다."
세종 24년의 기록은 우리를 더욱 난감하게 만든다. 세종은 승정원에 이렇게 지시한다.
"무릇 사람의 수종다리는 양기가 막힌 데서 말미암으니, 만약에 주술(呪術)을 행하여 음기가 속으로 들어오게 하여 음양이 서로 화하게 하면 혹 병이 낫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가 수종다리의 병이 발생하자, 한 주술 하는 소경을 불러 다스리게 하였더니 조금 나았다. 비록 이것으로 쾌히 낫지는 못하였으나 주술에 힘입어 삶을 얻은 것이니, 그 소경에게 옷 한 벌과 쌀 2석을 하사하라."
조선의 왕은 유학의 수호자였지만, 세종은 한평생 불법(佛法)을 통해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했다. 자신이 가장 절절히 사랑했던 어머니의 대비 능에 절을 지으려고 일대 논쟁을 벌인다. 상대는 존경하지만 두려워하는 아버지 태종이었다.
"주상이 산릉에 절을 설치코자 하나 불법은 내가 싫어하는 바이다. 만일 이 능에 내가 들어갈 터라면 설치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태종이 따로 능을 쓸 거면 절을 만들고 부부 합장을 하려면 쓰지 마라는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태종도 세종의 불심을 막지 못했다. 세종 30년 8월 5일엔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궁 옆에 불당을 설치해 부왕의 쾌유를 빌었으며, 32년엔 형 효령대군의 집으로 옮겨 불교 의식인 공작제를 지냈다. 32년 2월엔 스님 50명을 모아 임금 앞에서 질병의 쾌유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다. 병의 고비마다 유교적 가르침보다는 불교적인 기도나 무속을 선호했던 것이다.
말년엔 실지(實地)의 일에 쓸모없는 선비를 뜻하는 우유(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는 말로 유학자들을 폄하하자 사관이 세종의 인생역정을 평가한다.
"유학을 숭상하여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사를 모아 강관에 충당하고 밤마다 3, 4고가 되어서야 비로소 취침하였다. (…) 중년 이후에 연속하여 두 아들을 잃고 소헌왕후가 별세하니 임금이 그만 불교를 숭상하여 불당을 세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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