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고통 준 肝
많은 사람이 과연 한의학이 눈 질환을 치료할 수 있었을지 의문을 나타내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실명을 일으키는 녹내장도 치료했다. 더 대단한 것은 그 치료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냉이(정확하게는 냉이의 씨앗)를 썼다는 점이다.
냉이 씨의 약명(藥名)인 석명자의 한자 뜻은 냉이의 효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석은 나무를 깨서 나눈다는 뜻이고, 명은 어둡다는 뜻이다. 눈이 캄캄하고 어두운 것을 깨서 없앤다는 의미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냉이 씨의 효능은 좀 더 구체적이다. '청맹목통(靑盲目痛)하여 사물을 볼 수 없는 질환을 치료한다'고 쓰여 있다. 청맹목통은 녹내장의 전형적 증상으로, 겉으로 보기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고 통증이 심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의학은 녹내장이 방수의 흐름이 나빠지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방수는 수정체와 각막 사이에 흐르는 눈 속의 눈물로, 혈액에서 걸러져 나온 것인데 흐름이 나빠지거나 안구 속에 고이면 눈의 압력이 높아지고 시신경을 눌러 시력을 저하시키고 통증을 일으킨다.
냉이는 물을 몸 밖으로 뽑아내는 이수나 이뇨 작용을 통해 녹내장을 치료한다. 특히 동네 어귀 냇가에 많이 자라는 큰황새냉이가 효험이 좋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석명자는 큰황새냉이를 말한다. 물가에 자란 것이 눈 속의 물을 빼내는 효능을 발휘한다고 여겼다. 어린 순과 잎은 뿌리와 더불어 이른 봄을 장식하는 나물이다. 냉이국은 뿌리도 함께 넣어야 참다운 맛이 난다. 데워서 우려낸 것을 잘게 썰어 나물죽을 끓여 먹기도 한다.
하지만 눈 질환이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 재위 40년에 들어서면서 간 질환은 악화일로였다. <난경>에 '간이 병들면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며 대변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숙종은 이런 증상을 그대로 보였다. 재위 40년 4월 27일 실록은 "상의 환후가 7개월 동안 계속돼 증세가 백 가지로 변해 부기(浮氣)가 날로 더해졌다"고 했다. 부종이 계속되자 선조의 증손으로 종친이었던 유천군 이정은 "성질이 강력한 약을 쓰면 안 된다"는 어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수환(導水丸)'이라는 처방을 고집했다. 이 약이 크게 효험을 보이자 감탄한 숙종은 스스로 시를 지어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여덟 달을 온갖 방술로 다스렸지만 한 가지 환약으로 빠른 효험을 얻었네. 지극한 그 공로 내 마음에 새겨두니 종친에게 은총을 표하노라."
유천군이 처방한 도수환은 대황, 목통, 견우자 등의 약재를 포함한 약으로 강력한 이뇨 효과와 대변의 관장 효과를 겸한 처방이었다. 이 약으로 큰 효험을 봤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숙종에겐 대소변을 제대로 못 본 게 가장 큰 문제였던 셈이다. 이런 일련의 치료 사실을 살펴보면 숙종의 주요 질병은 간 질환이었으며, 그 범주 안에서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됐음을 알 수 있다. 숙종은 재위 45년 10월 아들 연령군이 사망하자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46년 5월에는 간경화 말기 증세인 복수가 차올랐다.
"시약청에서 입진하였다. 성상의 환후는 복부가 갈수록 더욱 팽창하여 배꼽이 불룩하게 튀어 나오고, 하루에 드는 미음이나 죽의 등속이 몇 홉도 안 되었으며, 호흡이 고르지 못하고 정신이 때때로 혼수상태에 빠지니, 온 조정과 백성(中外)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후 한 달 만에 숙종은 세상을 떠났다.
두창과 인두법
숙종의 목숨을 빼앗은 병이 간 질환이라면 그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질환은 조선 시대 민중을 무척이나 괴롭힌 두창(痘瘡·천연두)이다. 예부터 마마, 손님, 포창(疱瘡)으로 불렸으며 일본에서는 천연두(天然痘), 중국에서는 천화(天禍)라 불린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백세창(百世瘡)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백세창은 평생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전염병이라는 뜻으로, 한번 전염병에 걸려서 살아남으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면역의 기본원리를 우리 조상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연두는 공기로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환이다. 일단 감염되면 고열과 발진이 일어나고 두통, 구토, 몸살 증상이 수반되며 2~4일이 지나면 얼굴, 손, 이마에, 이후에는 몸통에 각각 발진이 생긴다. 증상이 일어난 지 8~14일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흉터가 남는다. 천연두에 대한 기록은 4세기경 진(晉)나라 의사인 갈홍이 의서에 상세히 기록한 것이 처음이다. 우리에겐 조선 태종 때부터 본격적인 기록이 나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무서운 질병으로 인식됐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4세 이전의 영아 40~50퍼센트가 두창으로 사망한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두창 치료법으로 인두법을 주로 썼다. 인두법을 처음 소개한 인물은 공식적으로는 정약용이다. 어린 시절 두창을 앓다가 죽을 뻔한 데다 여러 아이를 두진으로 잃은 아픔 때문에 인두법에 관심을 갖게 됐다. 청나라 <강희자전>에서 "모든 두즙(痘汁·천연두즙)을 코로 받아들여 숨 쉬면 (천연두가 빠져) 나가게 된다. 이를 신통한 종두법이라고 한다"라는 구절을 보고 질병을 내부에서 외부로 밀어내는 보편적 한의학적 논리에서 외부에서 내부로 심는 종두법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핵심은 두창의 딱지인 시료를 채취하는 방법이었다. 천연두의 고름인 두장(痘漿)을 직접 채취해 쓰는 법과 두창을 앓은 이의 옷을 입히는 법, 마마 자국을 말려 가루로 만든 뒤 코로 빨아들이는 법 등이 있었는데,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으로는 습기 있는 두흔(痘痕·마마 자국)을 코로 빨아들이는 수묘법(水苗法)이 권장됐다.
이런 방법은 잘못하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묘를 만드는데, 좋은 묘를 구해서 도자기 병에 넣고 밀봉해 숙묘 단계로 변화시켜 사용한다. 이때 모든 책임은 의사가 짊어져야 한다. 그러자 시중에선 갖가지 황당한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종두에 적합한 계절과 날짜, 시료 채취용 아이의 선택 방법이 따로 있으며, 이를 잘 정해야 만일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의 인두법이 분명히 효과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의 전면에 허준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도 두창이 있다. 일개 의관에 불과한 허준이 어의 양예수를 제치고 선조의 총애를 받은 것은 광해군의 두창 때문이었다. 광해군의 두창을 과감한 처방으로 치료하자 선조는 그를 일약 당상관에 제수했다. 허준은 그 이전까지 두창 증세와 기존 전염성 질환의 증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두창이라는 이름을 정확한 병명으로 분리해 공식적인 의학 용어로 확립한다.
천연두 전문 의사 유상
숙종에게 두창은 잊을 수 없는 질환, 원수 같은 질환이었다. 첫 부인인 인경왕후, 그다음으로는 숙종 자신이 두창을 앓았고, 왕세자인 연령군도 두창에 걸려 고생했다. 특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는 숙종의 두창을 치료하기 위한 기도에 나섰다 무리해 세상을 떠난다.
실록에 기록된 두창의 첫 번째 희생자는 숙종의 전 부인이자 <사씨남정기>로 유명한 김만중의 조카딸 인경왕후였다. 숙종 재위 6년의 일이었다. 10월 19일 인경왕후가 두창이라는 확진이 떨어지자 숙종과 명성왕후는 창경궁으로 옮기고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남아 있다 10월 26일 승하한다.
재위 9년 10월 18일에는 숙종이 두창에 걸린다. 치료는 처음엔 내의원에서 주도했다. 하지만 승마갈근탕이라는 처방이 오히려 발열 증세를 심하게 일으키자 두창 전문의 유상(柳)이 입시해 치료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화독탕으로 열을 가라앉힌 후 <동의보감>의 보원탕 처방을 썼다. 10월 27일 얼굴에 생긴 곪은 종기 때문에 증상이 다시 심해지자 사성회천탕이라는 처방으로 바꾸어 투여한다.
사성회천탕은 보원탕이라는 처방에 웅황(雄黃·천연 비소 화합물)을 더한 것으로 선조, 광해군 때의 인물인 학송 전유형이 만든 독자적인 처방이다. 전유형은 해부학적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 독특한 의사이자 문신으로, 두창에 대한 그의 처방은 박진희, 이경화 등 조선 후기 의사에게 널리 퍼졌다. 이런 노력 덕택일까. 10월 29일 숙종은 열이 내리고 얼굴에서 딱지가 떨어지면서 호전됐다. 치료를 주도한 유상은 <증보산림경제>를 지은 유중림의 아버지로 서얼 출신이었다. 이후 유상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지중추부사로 두 계급 특진의 영예를 누리면서 연령군의 두창 치료에도 참여한다.
엄동설한의 찬물 세례
숙종의 두창은 권력 지도까지 바꿔놓았다. 명성왕후가 숙종의 치료를 위해 기양법(祈禳法)을 행하다가 승하했기 때문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어머니의 강력한 보호를 받았지만 결국 두창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실록에 기록된 명성왕후의 모습은 한마디로 '극성스러운 어머니' 그 자체였다. 재위 1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
"당초에 자전(명성왕후)은 여러 공자들이 은밀히 화를 일으킬 뜻을 품었음을 알고, 행여 독살 시도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임금의 음식을 모두 친히 장만하여 손수 갖다 드렸다."
대비의 과도한 간섭으로 직접 음식을 장만하다보니 신하들 사이에 뒷말이 나왔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엄마표 집밥' 덕분일까. 숙종은 조선 왕 중에서 영조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다.
명성왕후의 과도한 자식 사랑은 결국 자신의 명을 재촉한다. 급한 마음에 무당을 불러 점을 봤는데 숙종의 두창이 명성왕후에게 든 삼재(三災) 때문에 생겼다는 점괘를 받는다. 명성왕후는 비장한 각오로 무당의 처방에 따라 삿갓을 쓰고 소복차림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엄동설한에 물벼락을 맞은 그녀는 결국 병을 얻고 그해 12월 5일 승하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상이 두창을 앓았을 때 무녀 막례가 술법을 가지고 금중(禁中·대궐)에 들어와 기양법을 행하였는데 대비가 매일 차가운 샘물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박세채가 상소하여 맨 먼저 이 말을 내었는데 임금이 처음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여러 번 쟁론하여 마침내 유배하게 되었다."
엄동설한에 차가운 물로 목욕하다 대비가 죽자 신하들은 무녀 막례를 처형하라고 여러 차례 건의하지만 숙종은 끝내 유배형으로 사건을 종결한다. 명성왕후의 아버지는 서인 김우명(1619~1675년)으로 남인(윤휴)과의 대립에서 패하고 화병으로 죽은 인물이다. 명성왕후는 말과 글로 '음식을 끊고 자결하겠다'는 말을 내릴 정도로 남인을 증오한 인물이었다. 남인 출신 장옥정(장희빈)이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난 것도 그 때문이다. 숙종은 어머니가 죽자 장옥정을 다시 입궐시켜 숙원에 봉했다. 천연두가 조정의 권력 지도까지 바꾼 셈이다. 조선시대도 그렇지만, 지금도 지도자의 질병과 건강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요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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