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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독립 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는가?


독립 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는가?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문서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잠시 일본에게 외교권을 맡긴다는 항변. 그것이 매국의 시작이었습니다.


1919년 3월 19일에 이완용이 데라우치에게 쓴 편지에는 3.1운동을 잠재우는 방법이 적혀있습니다. 내선인동화,국어보급이 그것입니다.


1919년 1월 고종이 덕수궁에 승하합니다. 그리고 고종장례식 이틀로 다가왔을 때 3.1운동은 서울로 시작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1운동은 친일파도 독립만세를 부르게 할정도로 그 여파는 컸고 이완용도 다른 친일파처럼 자신에게 이것이 친일파 딱지를 떼어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독립운동을 제압하는 방법이 담긴 편지를 씁니다.


그것은 일제가 자신에게 준 힘과 지위를 지키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이완용은 그리고 3번 연달아 3.1운동 경고문을 씁니다.


일당기사에 쓰인 3차 경고문에는 조선의 독립은 허망한 것이라고까지 쓰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완용은 창덕궁을 일본황실의 별궁으로 만들어야 자신의 일본조선일체화목표가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제를 만들어 조선의병토벌에 이용하였으며, 그리고 이때 13도 의병연합군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쳤던 의병장 허위의 처벌을 상소한 것도 이완용이었습니다.


이완용 그는 과연 누구 였을까요?


이완용은 가난한 선비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완용이 10살 때 먼 인척이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완용은 명문가이면서 총명하여 출세는 예약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급제하고 고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관직진출 3년만에 정3품에 도달했습니다.


세자를 가리키는 역할을 맡아 순종과는 사제의 인연을 맺기도 합니다.


육영공원은 신진 관료를 기르기 위해 세운 근대식교육관인데, 그곳의 미국교사 헐버트의 첫제자가 바로 이완용이었습니다.

육영공원에서의 2년만에 이완용에게는 꿈을 펼칠 기회가 찾아옵니다. 고종이 대미외교를 꾸리면서 그팀에 이완용도 또한 발탁된 것입니다.


이완용은 또한 워싱턴에서 주미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정세에 눈뜨게되고 친미파 관료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완용 귀국 5년째 되던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그날새벽 이완용은 일본의 눈을 피해 알렌이 근무하던 미국공사관으로 도피를 합니다.


이날 이후 이완용은 일본에게 감금되어있는 고종을 피신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1896년 2월 하순 새벽을 틈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다. 이른바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아관파천은 친미파 이완용 등이 친러파 정치세력과 연합한 거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완용에대한 고종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고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일본에 내정간섭에 대항하는 충직한 고종의 신하였습니다.


독립문은 또한 열강세력들에 저항하며 자주독립의 의지로 세운 것입니다. 이 독립문건설도 이완용이 앞장서서 설립합니다. 이완용 등은 독립협회를 만들고 독립문 설립에 앞장섰습니다.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일삼던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한 직후였습니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곳에 독립문을 설립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완용은 매국의 길로 간 것일까요?


러시아가 조선에 경제적 원조는 해주지 않고 군사교관만 파견하면서 정치적확대를 시도하자 이를 이완용이 반대했기 때문에 이완용은 러시아 공사관의 미움을 사게됩니다. 그리고 애국계몽단체로 시작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를 거치면서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면서 성격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완용은 자신이 중앙에 있다면 그들의 대표자가 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것이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지방좌천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완용은 처음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중앙정계에 밀려난 것은 상처가 컸고, 직무태만으로 감봉되고, 공금횡령죄로 독립협회에서도 제명이 된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 1904년 일본과 러시아는 만주와 한반도를 무대로 전쟁을 하게됩니다. 일본은 예상을 뒤엎고 개전 1년만에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일본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급부상하고 러시아는 한반도를 일본에 넘겨준다는 포츠머스조약을 채결하게 됩니다.


재기를 준비하던 이완용이 고종의 부름을 받고 중앙정계로 다시 진출한 것은 1904년 11월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 미국공사관에 피신할 계획을 세우면서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를 바랬고 이완용등용은 친미파로써 그러한 계획을 강화하겠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은 빗나갔습니다.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인정하는 가쓰라데프트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완용은 더 이상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재기를 원하던 이완용은 다른 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서울로 도착을 합니다. 대신들이 모여있는 어전휴게실에 이토가 들어선 것은 자신이 내놓은 을사조약 체결안이 어떤 결론이 났는지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이완용은 대한제국 주권이 달린 중요한 결정에서 을사조약을 찬성을 합니다.이토는 이완용 덕분에 을사조약을 체결할수 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완용은 결국 개인적 출세를 위해 일본에 붙는 것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완용은 나라의 힘을 다시 키워 되찾으면 된다며 주장하지만 이완용은 5년뒤 나라의 통치권을 일본에 완전히 넘겨주는 한일합방문서에 서명을 합니다. 대세가 일본에 기울었으니 일본의 요구를 따라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1983년까지 천엔 지폐의 도안으로 있던 이토히로부미. 일본인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완용또한 이토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이토가 있는곳엔 이완용이 있었고, 이완용은 이제 고종과 대한제국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토의 동양평화론을 따르는 추종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일본이 주창한 동양평화론은 조선이 아직 독립하기엔 약하므로 러시아나 다른 유럽으로부터 일본이 같은 동양인인 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흘러 1909년 10월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토가 하얼빈역에 도착하는 순간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것입니다. 당시 이완용은 안중근을 맹렬히 비난하며 이토의 시신이 있는 중국 대련으로 급히 달려갑니다.

일당기사에는 이토가 나의 스승이다 라고 적혀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완용도 심판대에 오르게 됩니다. 지금의 명동성당에 이완용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20대 청년은 단칼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를 찔렀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은 23살의 이재명이었습니다.

이재명은 재판대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이완용의 죄명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나라의 외교권을 넘기고 통감부를 설치케한 죄,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강제로 물러나게 만든 죄, 정미 7조약을 체결하고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한일 병합을 추진한죄, 이완용이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것... ”


하지만 이완용은 치명상을 입고도 죽지않았습니다.


이완용이 친일로 얻은 땅은 전국에 걸쳐 있습니다. 이완용은 친일에 협조하면서 재산을 늘려나갔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은사금으로 지금의 30억원 규모를 받았습니다. 한일 신협약을 체결한후는 20억원.

이렇게 이완용은 재물에 대한 집착또한 강했습니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반역의 길을 놓치 않았습니다. 가진 것 또한끝까지 부여잡고 놓치않았습니다.

1926년 이완용은 죽어서도 장례식이 화려했습니다. 하지만 이완용이 죽은 후 한 신문 사설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그도갔다. 팔지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렸다.’

‘이제부터는 영원히 천벌을 받아야지.’


이름을 소중히 하라는 조상님들의 말씀을 저버리고 잘못된 길로 들어선 이완용은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