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전쟁 썸네일형 리스트형 역사전쟁(6/6) 더보기 역사전쟁(5/6) 더보기 역사전쟁(4/6) 더보기 기마민족 부여가 경상도 김해까지 왔다는 한.일사학계 (백과사전) 부여[夫餘]는 만주 서북부에 있던 예맥족의 고대국가로 북부여라고도 한다. 부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puhu'와 연결시키는 견해도 있으나, 평야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BC 1세기의 중국 문헌에 이미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BC 2세기 무렵에는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마여--> 의려--> 의라로 왕위가 이어진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대왕 69년(121) 고구리가 1만 군사로 현토성을 포위하니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를 보내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막아 싸우게 하니 고구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이듬해 태조대왕이 요동을 침범하니 부여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여 고.. 더보기 호태왕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날조한 일본 (백과사전의 설명)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간 일본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성이론의 대표적 산물로서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과 궤를 같이한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역사가 태고부터 외세의 간섭과 영향을 받아 타율적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는데, 쓰에마쓰[末松保和]가 이를 체계화한 바 있다. 그의 설에 의하면 3세기 중엽에 이미 왜인은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즉 임나가야(任那加耶)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왜왕은 그 중계지를 통하여 삼한(三韓)을 통제했다고 한다 또한 370년경에는 대규모 군..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