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세종은 오로지 존경 대상? 세종을 질투하라 한글날, 지도자 그리고 리더십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세종대왕은 몇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왕이 되었죠?" 아이들은 잠시 생각하다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4 대 1이요!" "3 대 1이요!" "경쟁률 없어요!" 각각의 답이 다 일리가 있다. 4 대 1이란 태종의 네 아들 가운데 뽑혔다는 뜻이고, 3 대 1이란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탈락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세 아들 가운데 뽑혔다는 뜻이리라. 경쟁률이 없다는 대답은 워낙 탁월한 인물이라 이미 태종의 마음속에서 확정되어 있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렸다. "3 대 1이라고 칩시다. 그러면 박근혜 대통령은 몇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대통령이 되었나요?" 아이들이 다소 어려워할 줄 .. 더보기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면… 세조의 건강학 흔히 권력을 위해서 핏줄을 희생시킨 태종과 세조를 비슷한 부류로 묶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둘은 겉보기는 비슷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태종은 한 때 자신의 혁명 동지였던 공신들, 그러니까 원경왕후와 처가, 가까운 형제 등을 왕권을 위해서 희생시켰다. 그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고자 자신의 주변을 희생시켰다. 반면에 세조는 자신의 혁명에 동참한 공신을 위해서 권력을 분배했다. 태종과 달리 세조는 자신의 사적 욕망을 최우선에 뒀다. 이렇게 자신의 끔찍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 죄의식은 당연히 공포로 마음을 짓누르기 마련이다. 태종이 피로 점철된 비극의 한가운데서 살아남았음에도 큰 정신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던 데 반해서, 세조는 왕.. 더보기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며느리의 동성애, 세종의 반응은… 문종의 건강학 ② 등창은 종기로 대표되는 옹저의 한 부분이다. 옹저가 생기는 원인에 대해 은 이렇게 설명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기의 뜻을 이루지 못하면 흔히 이 병이 생긴다." 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 드물게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킨, 정통성에 문제가 없는 왕이다. 그의 스트레스 원인은 바로 부인에게 있었다. 그는 세 번이나 홀아비가 됐던, 개인사가 불행한 왕이었다. 실록은 세종 11년 7월 20일 문종의 첫 부인 휘빈 김 씨를 폐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문종은 상호군 김오문의 딸과 결혼했다. 김오문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 씨와 남매지간으로 인척 관계였다. "내가 전년에 세자를 책봉하고, 김 씨를 누대 명가의 딸이라고 하여 간택하여서 세자빈을 삼았더니.. 더보기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문종의 건강학 ①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 재위 1450∼1452년)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 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를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 즉, '해가 없습니다.. 더보기
세종의 죽음, 진실은 이렇다! 세종을 평생을 두고 괴롭힌 건 안질이었다. 세종 23년 4월 실록은 그가 안질을 얻은 원인을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에 임금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였고, 또한 글과 전적을 밤낮으로 놓지 않고 보기를 즐겨 하였으므로 드디어 안질을 얻었다. 증상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픈 통증이 있었다. 재위 21년에도 지난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이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다." 세종의 안질에서 공통점은 안구에 통증과 건조한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안과 질환 중 통증이 있는 질환은 많지 않다. 건조감이 있는 건 눈물이 마르거나 결막염을 앓았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며 소갈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신생혈관증과는 구별된다. 23년의 기록에 안질.. 더보기
세종은 '고기 마니아'? 진실은 이렇다! 세종은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한 탓에 비만했다. 즉위년 10월 9일 태종은 유시(諭示)한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를 강습하려 한다." 살찌고 무겁다는 건 사실이었다. 일부 역사 연구가들은 세종이 대단한 대식가이고 살이 쪄서 소갈(消渴)증이라는 당뇨 증상을 앓았다고 주장하지만, 글의 의미를 짚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드는 예는 태종이 "세종이 고기가 아니면 식사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에도 권도를 좇아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도록 하라"는 유언을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실제로 허손(虛損)의 병에 걸려 대신들이 고기 들기를 .. 더보기
세종은 왜 무당의 푸닥거리에 집착했나? 조선 제4대 왕 세종(1397∼1450년, 재위 1418∼1450년)은 인간적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인권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죄수라도 인간적 처우를 해야 한다는 인권주의자였다. 죄수들이 겨울 추위에 얼어 죽을 것을 염려해 온옥(溫獄)을 만들라고 형조에 명을 내릴 정도였다. 간통의 경우에도 처벌 위주가 아니라 인간적 차원에서 적절한 형벌만 내렸다. 의 세종 15년 12월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윤수(尹須)·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다 음탕하고 더러운 행위로 일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았으니 악행을 징계하는 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건만, 감동·금동·연생 등(의 유사한 사건)이 잇따라 나왔으니, 남녀 사이의 정욕을 어찌 한갓 법령만으로 방지할 수 있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