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醫學/한방춘추

‘효부’를 졸도시킨 효


주부들 중에 흔히 ‘시금치’는 쳐다도 안 본다고 말한다. 시댁의 ‘시’자조차 듣기 싫다는 것. 그런데 ‘시’자보다 더 싫은 것이 ‘효(孝)’자라고 한다. 오죽하면 태권도·양궁·레슬링·유도가 싫은 이유가 ‘효자’ 종목이기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과연 ‘효자 남편’은 가정불화의 원인이며 ‘효’는 용도 폐기되어야 할 고루한 사상일까.

아내 보약을 짓기 위해 내원한 중년부부. 그런데 아내의 얼굴에 시커먼 멍이 들어 있다. 2주 전 거실에서 청소하던 중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벌써 세 번째다. 매번 응급실에서 뇌CT 검사도 했지만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맥을 보니 화병과 우울증 맥이었다. 혀에도 오래된 스트레스 반응들이 관찰됐다. 누적된 시댁갈등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졸도였다. 꾀병과는 다르다. 결혼 후 줄곧 시댁의 간섭이 올가미처럼 옥죄는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가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나타난다.

하루에도 대여섯 차례 시어머니와 시누이로부터 번갈아 전화가 온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무얼 하냐, 저녁은 먹었느냐, 반찬은 뭐냐?’라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캐묻는다. 다정다감이라 하기엔 도가 지나치다. ‘누가 고구마를 갖다줬다’며 굳이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시댁까지 와서 가져가라 요구한다. 새벽 5시 출근할 남편은 저녁 늦게라도 반드시 다녀온다. 그게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결혼 후 줄곧 시댁 근처에서 살다가 신도시 아파트가 당첨되어 이사왔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전세 주고 다시 근처로 와라”고 압박한다. 이런 압박에도 환자는 여린 성정이라 적극적으로 반발하지 못했다. 효자 남편 역시 시댁과 아내 사이에서 끌려만 다니다 보니, 환자로선 졸도 외엔 달리 돌파구가 없었던 것이다.

환자 남편이 과연 효자일까? 이대로라면 수없이 반복될 마음의 상처와 졸도 예방을 위해서라도 남편에게 효 개념을 수정해주었다. 이제마 선생은 ‘충효우제(忠孝友悌)는 모진 상황을 피할 때만 발휘되어야 선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즉, 나라가 외침을 당하면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가 늙고 병들면 효로써 돌보고, 벗이 어려움에 처하면 우애로 돕고, 윗사람이 좋은 일을 도모하면 공경으로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는 장성한 자식에게 계속 젖을 물리려 집착하고, 자식은 젖을 떼지 못하고 부모가 늙기도 전에 무조건 충성하면서 효라고 착각한다. 상황 구분 없는 맹종은 효도가 아니라 부모의 노예로 사는 것이다.

‘마마보이’나, 처가는 안중에도 없고 시댁에만 무조건 충성하라는 식을 선조들은 결코 효라고 보지 않았다. 부모의 요구도 어린아이 다루듯 현명하게 구분해야 진정한 효다. 효의 본질을 바로 알면 효자남편이 미울 일도, 21세기라 효 개념을 새삼 뜯어고칠 이유도 없다.

집착이 강한 부모의 요구에 끌려다니면 결국 부부간의 틈만 커진다. 차라리 ‘마누라라면 꼼짝 못하는 팔불출’ 소리를 듣는 게 현명하다. 그래야 부모의 집착도 더 커지지 않고 온전히 모실 수 있는 효가 실현된다.

“한 가정에 애로희락이 편벽되면 그 근심이 예리한 칼과 같아 창자를 도려내고 사람을 병들게 하니, 오직 현명한 효자효부만이 막을 수 있다”는 이제마 선생의 가르침이 요즘이라고 굳이 달라져야 할이유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