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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낮은 한의학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조선에도 여왕이 있었다

명종의 건강학 ①

문정왕후 윤 씨는 조선 제12대 왕 인종(1515~1545년, 재위 1544~1545년)과 제13대 왕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의 어머니로, 중종의 계비다.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 공신은 중종과 그의 첫 부인인 단경왕후 신 씨를 강제로 헤어지게 만든다.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과 처남, 매부 지간으로 반정에 반대했기 때문에 겪은 불행이다. 인왕산의 치마바위는 쫓겨난 신 씨가 구중궁궐에서 중종이 혹시 자신을 바라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바위에 치마를 걸치고 궁궐을 바라봤다는 애달픈 한이 서린 장소다.

중종의 둘째 부인은 장경왕후인데,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출산한 아이가 인종이다. 장경왕후의 출산을 도운 이는 TV 드라마로 유명한 장금이다. 셋째 왕비가 바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제였던 문정왕후다. 두 딸을 낳은 그는 결혼 17년 만인 중종 29년에 훗날 명종이 되는 왕자를 생산했다.

문정왕후는 인종과 명종 두 왕의 건강과 죽음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명종 20년 4월 6일, 사관이 쓴 윤 씨의 졸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윤 씨는 천성이 강한하고 문자를 알았다. 인종이 동궁으로 있을 적에 윤 씨가 그를 꺼리자, 그 아우 윤원로(尹元老), 윤원형(尹元衡)의 무리가 장경왕후의 아우 윤임(尹任)과 틈이 벌어져, 윤 씨와 세자 양쪽 사이를 얽어 모함하여 드디어 대윤, 소윤의 설이 있게 되었다.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고위(孤危)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 씨를 섬겼다. 그러나 삼조할 즈음에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왕)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까지 말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이어서 우상(憂傷)이 되어 승하하게 되었다."

친아들인 명종도 문정왕후의 압박에 건강을 해쳤다.

"스스로 명종을 부립(扶立)한 공이 있다 하여 때로 주상에게 '너는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으랴' 하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곧 꾸짖고 호통을 쳐서 마치 민가의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함이 있었다. 상(임금)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김없이 받들었으나 때로 후원의 외진 곳에서 눈물을 흘리었고 더욱 목 놓아 울기까지 하였으니, 상이 심열증(心熱症)을 얻은 것이 또한 이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 명종을 괴롭힌 심열증의 뿌리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4월 20일 명종이 지시해 만든 공식 문서는 사뭇 다르다.

"인종이 원자로 있을 때 부지런히 애써 무양(어루만지듯이 잘 돌보아 기름)함이 자기 소생보다 더 나았다. 항상 인종의 학문이 날로, 달로 진취함을 기뻐하여 유모, 보모, 시인(侍人)의 무리에게 자주 상을 주었다. 인종과 효혜공주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을 애통히 여겼고, 공주의 자제에 이르러서도 모든 일을 일체 공주의 예에 의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문정왕후는 두 번이나 공주를 낳은 끝에 결혼 17년 만에 명종을 낳는다. 그 동안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누르고 쓴 맛 단 맛을 보며 권력의 속성으로 앞날을 파악한 여장부다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문정왕후는 권력을 잡자 자신과 대립했던 대윤파를 일소했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을사사화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이지만, 그 이면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 세력과 성리학의 원리주의자인 사림 세력 간 갈등이 배경으로 있었다.

사림은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 때문에 사림과 갈등을 겪으면서 불교를 옹호한 문정왕후를 실록이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문정왕후의 권세를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은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양재역 벽에 대자보 성격의 글이 게시된 것이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주는 여왕의 권력을 가진 분이라는 뜻이다. 이 사건으로 중종과 희빈 홍 씨 사이에 난 인종과 명종의 이복형제 봉성군 이완이 사사(賜死)당한다. 불교는 세종마저 평생의 위안처로 삼았으면서도 대놓고 절 하나 마음대로 지을 수 없었던 조선의 이단 종교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를 육성하고 도첩제를 만들어 승려 보우를 우대한 문정왕후의 배짱은 조선의 미스터리다. 반면 유학적 소양을 지닌 명종이 얼마나 어머니의 압박에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인종의 극단적 도덕성

  ▲ 2001~2002년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전인화)

사실 이런 경향은 즉위 7개월 만에 사망한 인종 때부터 있었다. 인종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을 뼛속까지 체화했다. 명종 즉위년 7월 27일 인종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됐다.

"왕의 성품이 엄중하여 평소 한가롭게 소일할 적에도 조용히 침묵하면서 희롱하는 말이 없었고, 찡그리거나 웃는 모습을 외형에 나타내지 않았고, 좌우의 근시(近侍)들에게도 일찍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미덕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며, 혹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좋아하지 않는 빛이 있었다. (…) 성색(음악과 여색(女色)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유학이 공자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의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했다면, 성리학은 주자를 조종으로 해 태어난 바 마음의 이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은 유학이 콤플렉스로 가지고 있던 불교적 공(空)의 세계와 도교의 도(道)의 세계까지 그 관심사를 확장해 마음의 태극을 닦아가는 공부였다. 인종은 바로 그런 성리학적 세계관에 깊숙이 빠진 그런 인물이었다.

조선시대 왕의 이상형은 내성외왕(內聖外王)이다. 안으로 성현 같은 인격을 완성하고 밖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하는 것이다. 성현은 당연히 공자와 주자가 롤 모델이다. 공자는 <논어> '향당 편'에서 자신의 식생활 습관을 밝히면서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했다. 생강이 정신을 소통하고 내부의 탁한 악기를 없앤다고 주석을 달았다.

인종은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조선 전기에 왕세자의 교육을 맡아 보던 관아)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했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에 보내는 것이니, 한 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매운 생강을 선물하며 극단의 공자 따라 잡기를 한 것이다.

인종과 연산군은 매우 대조적이지만 비슷한 면도 많다. 일찍 세자로 책봉됐고, 어머니가 얼굴도 모르던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며, 계모의 손에 자라 다음 왕위가 계모의 아들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모두 파평 윤 씨였고, 31세에 사망한 점도 닮았다. 하지만 인종은 사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또 극단적으로 효심을 발휘했으며 도학자로서의 금욕 정신을 실천한 반면, 연산군은 처용무라는 탈춤을 추고 백모를 겁간하면서 소의 태(胎)를 먹는 극단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극단적인 도덕성도, 극단적인 쾌락도 건강을 해친다는 평범한 진리를 역사가 확인해 준 셈이다.

실록은 인종의 효심이 죽음에 이르는 병의 원인이 됐음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별다른 질병이 없었다. 자신의 누님인 효혜공주의 죽음을 슬퍼해 초췌해졌다는 기록이 유일하다.

"왕이 성복(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음)에서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까지 죽만 먹고 염장(鹽醬)은 먹지 않았으며 밤에 편히 자지 않고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상차를 떠나지 않았다. 왕이 시질(侍疾) 초두부터 초췌함이 너무 심하였는데, 대고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너무 슬퍼한 나머지 철골이 되어 지팡이를 짚고서야 일어날 지경이었으므로 대신이 선왕의 유교를 들어 아뢰면서 권도를 따라 육선을 진어하라고 청하면, '나의 성효가 미덥지 못하여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하면서 더욱 애통해 하였다."

병이 더욱 악화된 것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무리했기 때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문정왕후의 인종 독살설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