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왜 '단종의 비극'을 막지 못했나?
문종의 건강학 ①
왕의 질병은 역사를 바꾼다. 종기는 조선 왕들의 단골 메뉴였지만, 제5대 왕 문종(1414∼1452년, 재위 1450∼1452년)의 종기만큼 역사의 흐름을 확실히 바꾼 질병은 없었다. 문종이 종기로 재위 2년 만에 세상을 등진 사건이 단종, 세조 사이 권력 쟁탈전의 분수령이 됐던 것이다.
세종 31년 10월 25일 <조선왕조실록>은 세자 이향(문종)의 종기를 처음 기록했다.
"세자에게 등창(背疽)이 생기니, 여러 신하를 나누어 보내 기내의 명산, 대천과신사, 불우에 빌게 하고, 정부 육조 중추원에서 날마다 문안을 드리게 하였다."
11월 15일 기록은 종기가 완치됐음을 알린다.
"동궁의 종기는 의원의 착오로 호전되지 못했음에도 이를 물은 즉, '해가 없습니다' 하여, 동궁으로 하여금 배표(조선 시대에 왕이 중국 황제의 표문(表文)을 받던 일)하고 조참(한 달에 네 번 중앙의 문무백관이 정전(正殿)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고 정사(政事)를 아뢰던 일)까지 받게 하였다니, 걸음걸이에 몸이 피로하여 종기의 증세가 다시 성하게 한 것이었다. 또 실지(實地)로서 아뢰지 않아서 갑자기 중함이 이르게 하여 위태로운 증세가 심히 많았으니, 의원의 착오를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느냐, 어쩔 수 없어 생명을 하늘에 맡겼더니, 다행하게도 이제 종기의 근(腫核)이 비로소 빠져나와 병세는 의심할 것이 없게 되어, 한나라의 경사가 이에 지날 수가 없다."
세자의 등에 난 종기인 등창의 크기와 모양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됐다. 세종 32년 1월 26일의 기록이다.
"세자가 작년 10월 12일 등 위에 종기가 났는데, 길이가 한 자가량 되고 넓이가 5, 6치(寸)나 되는 것이 12월에 이르러서야 곪아 터졌는데, 창근(瘡根)의 크기가 엄지손가락만한 것이 여섯 개나 나왔고, 또 12월 19일 허리 사이에 종기가 났는데 그 형체가 둥글고 지름이 5, 6치나 되는데, 지금까지도 아물지 아니하여 일어서서 행보(行步)하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의방에 꺼리는 바로서 생사(生死)에 관계되므로, 역시 세자로 하여금 조서(요절)를 맞이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자의 등창은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길이가 30센티미터, 너비가15~18센티미터 되는 아주 큰 종기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호전됐지만, 12월 19일 허리에서 재발했고, 이 종기는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위협한다.
문종에게 처음 발병한 종기는 배저(背疽)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癰)과 저(疽)로 나눈다.
"옹은 병이 얕은 곳에서 생기며 급하게 달아오르지만 치료하기 쉽다. 저는 독기가 속에 몰려 있으므로 치료하기 어렵다."
문종의 종기는 안타깝게도 치료하기 어려운 저에 속하는 배저, 등창이었다. <동의보감>은 옹저가 생기는 부위에 따라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면서 부위를 5곳으로 분류했다. 그 중 한 부위가 바로 등이었다. <동의보감>은 등 부위에 생긴 등창의 원인을 이렇게 지적했다.
"등은 방광경과 독맥(회음부에서 시작해 등의 척추 중앙선을 따라 위로 올라 목을 지나 머리 정수리를 넘어 윗잇몸의 중앙에 이르는 경맥)이 주관하는 곳이지만 오장은 다 등에 얽매여 있다. 혹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거나 성을 몹시 내고 성생활을 지나치게 하여 신수가 말라서 신화가 타오르면 담이 엉키고 기가 막히는데 독기가 섞이면 아무데나 옹저가 생긴다."
문종은 술이나 기름진 음식을 좋아했을까? 문종 2년 2월 14일, 실록은 그가 아우들에게 한 말을 이렇게 기록했다.
"남녀와 음식의 욕심은 사람에게 가장 간절한 것인데, 부귀한 집의 자제들은 이것 때문에 몸을 망치는 이가 많다. 내가 매양 아우들을 보고는 순순히 경계하고 타일렀으나 과연 능히 내 말을 따르는지는 알 수가 없다."
문종의 등창이 독한 술이나 기름진 음식으로 인해 생겼다고 보긴 힘든 대목이다. 당시 실록의 평가도 그의 말과 일치한다.
"희로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음악과 여색을 몸에 가까이하지 않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수양하였다."
건강은 여러 가지 요건이 합리적으로 맞아떨어질 때 유지된다. 실록은 문종의 건강에 일부 적신호를 보였던 부분도 언급했다.
"임금의 성품에 지극히 효성이 있어 양궁(세자와 세자빈을 아울러 이르던 말)에 조금이라도 편안치 못한 점이 있으면 몸소 약 시중을 들어서 잘 때도 띠를 풀지 않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 세종이 병환이 나자 근심하고 애를 써서 그것이 병이 되었으며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너무 슬퍼하여 몸이 바싹 야위셨다. 매양 삭망절제에는 술잔과 폐백을 드리고는 매우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르니, 측근의 신하들은 능히 쳐다볼 수 없었다. 3년을 마치도록 외전(外殿)에 거처하셨다."
실제로 세종에 대한 그의 효심은 놀랄 만큼 지극했다.
"세종께서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친히 복어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보게 되었으므로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후원에 앵두를 심어 무성하였는데 익은 철을 기다려 올리니 세종께서 반드시 이를 맛보고 기뻐하시기를 외간에서 올린 것이 어찌 세자가 손수 심은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복어는 전복을 말한다. 물고기인 복어와 다르다. 실록에선 우리가 익히 아는 복어를 하돈(河豚)으로 표시했다. 이런 사실은 세종 6년 실록의 한 대목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전라도 정읍현의 정을손이 그의 딸 대장과 후처 소사가 음란한 행실이 있으므로 이를 구타하고, 또 대장의 남편 정도를 구타하여 내쫓으려고 하니, 정도가 하돈(河豚)의 독을 을손의 국에 타서 독살하였는데, 소사와 대장은 이것을 알면서 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정도는 옥중에서 병사하였으니, 소사 대장만 율에 의하여 능지처사(능지처참)하소서."
세종은 왜 수양 대신 문종을 선택했을까?
세종은 오랫동안 소갈증과 안질로 고생했다. 세종 21년 6월 21일, 그는 자신의 질병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다.
"소갈증이 있어 열서너 해가 되었다. 지난 봄 강무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을 가리는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져서 한 걸음 앞에 있는 사람만 알겠다."
전복은 안질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전복은 간의 열을 내리면서 눈을 보호하는 최고의 음식이다. 한의학에서 간은 봄과 나무를 상징한다. 봄은 영어로 'spring'이다. 용수철처럼 압축된 힘으로 튀어 오르는 에너지를 가진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처럼 간의 본질은 튀어 오르는 양기다.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다 심하면 병이 든다. 눈은 간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에선 눈을 불의 통로라고 본다. 어두운 밤길에서 고양이를 보면 눈이 파랗게 불 타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간 질환으로 발생한 분노와 초조함의 화병은 불의 통로에 불을 더해 눈의 신경을 위축시킨다. 화는 위로 타오르면서 어지럼증을 만들고 혈압을 상승시킨다.
이런 한의학의 논리로 보면, 전복은 음이 성질을 가졌다. 생긴 모양도 그렇지만 수축하고 탱글거리는 육질이 응축한 음의 성질을 띤다. 전복의 수축하고 응축한 힘은 튀어 오르는 양기를 진정시키고 열을 내린다. 간의 화로 인한 두통을 개선하고 혈압을 내리면서 눈을 밝혀준다.
<본초강목>은 눈병의 증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햇빛을 보면 눈이 시린 사람은 (전복에) 국화꽃을 같이 달여 먹으면 좋다."
일반적으로 전복 살을 먹지만 시력을 개선하는 효과는 전복 껍데기가 더 크다. 전복 껍데기'석결명(石決明)'이라고 한다. 전복 껍데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구멍이 있다. 보통은 9개의 구멍이 있다고 해서 '구공라(九孔螺)'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본초강목>은 심지어 구멍이 7개나 9개는 괜찮지만 10개는 약물로 사용하지 말라는 당부까지 기록했다.
전복 껍데기를 데워 눈에 찜질하는 것만으로도 효험이 있다. 전복 껍데기는 거칠고 울퉁불퉁하지만 속껍데기는 색으로 영롱하게 빛난다. <본초강목>은 바로 이런 형태적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이렇게 효능을 설명한다.
"석결명은 담(痰)이라는 불순물과 열로 인한 거친 허물이 가리는 현상을 없애고(각막의 노화나 위축) 찬란하게 빛이 나는 밝은 시력을 회복하는 데 약효가 있다."
소갈이라는 이름도 열로 태워 갈증을 유발한다는 뜻이고 보면, 음의 성질을 띤 전복은 세종에게 좋은 음식 이상의 약선 요리였다. 수많은 음식 중 세종에게 딱 맞는 약선 음식을 찾아냈다는 건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한 문종의 열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세종은 소갈, 건습, 종기, 안질 등을 앓은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계속되자 세종 24년 7월 28일 당나라 세자가 정무에 참여했던 첨사부의 전례를 따라 첨사원 설치를 명한다. 세종은 25년 계조당을 만들어 세자인 문종의 섭정 시대를 열었다.
이후 세종 32년까지 문종은 8년여 국왕 권한을 행사하면서 실질적인 왕 노릇을 한다. 세종의 태평성대는 아버지 세종과 아들 문종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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