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손(정조)은 문에 들어오자마자 곧 관을 벗고 손을 모아 애걸하였다. 영조가 멀리서 세손을 보고는 진노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세손을 모시고 나가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 세손은 문으로 들어와 땅에 엎드린 후 세자(사도세자)에게로 점점 가까이 기어왔다. (…) 별군직이 세손을 안고 나가려 하자 세손이 저항했다."
승정원 사서 이광현의 일기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죽는 장면을 여과 없이 기록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이후,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의 삶은 화증(火症)으로 점철됐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봤다고 알려진 경종이 간질, 화증을 앓다 일찍 죽은 것과 비교하면 초인적인 자기절제를 발휘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광증은 영국의 정신과 의사 존 볼비의 애착 이론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볼비는 1950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부모를 잃고 모성 결핍을 겪은 아이들을 연구해보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는 초기 아동기에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평생 지적, 사회적, 정신적 지체를 겪었다고 보고했다. 2차 연구에선 결핵을 앓아 요양소에 격리된 어린이들을 분석했는데, 이 아이들이 감동 결여성 인격 장애로 반사회적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음을 밝혀냈다.
유아에게 부모는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주고 음식물을 제공하는, 신과 같은 전능한 존재다. 따라서 이렇게 절대로 실패해선 안 될 인간관계에 실패했다는 것은 회한과 공포, 불안 등과 뒤섞여 아기의 마음에 새겨진다.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벗어나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혼자 꿈의 세계를 만들어 현실과 뒤섞이게 된다. 신경증 또는 정신병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양육 과정에 대한 묘사는 초기 애착 과정에 실패한 이유를 잘 설명한다. 세자의 위엄을 세우려고 태어난 지 100일 만에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승전(儲承殿·왕세자 동궁의 처소)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것도 그의 모친이 아니라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을 보모로 썼다. 세자를 보려고 들른 영조는 나인들의 불손한 태도에 화가 나 저승전을 찾지 않게 되면서 사이는 더 멀어진다.
이 점을 혜경궁은 정확히 집어냈다.
"부모 측에서 양육하며 성취하지 않으시게 하고 처소가 멀리 떨어져서 인사를 아실 때부터 떠나심이 많고 모이심이 적으니 조석에 대하는 사람은 환신, 궁첨이요, 들으시는 것이 항간의 잡담뿐이니 이것이 벌써 잘되지 못한 장본이며 어찌 슬프고 원통하지 않으리오."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영조와 사도세자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엄격한 아버지 영조의 교육 방식은 한중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영조 38년, 사도세자는 화증이 더해 당번 내인 김한채를 죽여 그 머리를 들고 다니다 영조의 질책을 받는다. 사도세자는 이렇게 답변한다.
"사랑치 않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럽니다."
무수리 엄마와 경종 독살 사건으로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영조는 아들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키웠던 것이다. 심리학자 기 코르노는 저서 <부재하는 아버지, 잃어버린 아들(Absent Fathers, Lost Sons)>에서 자식이 갈망하는 칭찬, 애정 표현, 인정을 아버지가 보류하는 것은 심리학적 연구 대상이며 보편적 현상으로 정의했다.
▲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이산>
"젊었을 적 열이 많아…"
영조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자주 질책했다. 그 정점에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병하고 뒤주 사건이 생기면서 정조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게 됐다. 정조의 질병은 여기서 시작됐다. 아버지 죽음의 트라우마가 화증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혔다. 정조의 죽음은 종기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동의보감>은 종기를 '옹저(癰疽)'로 표현하는데 그 원인을 화로 인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
"옹(癰)은 막힌다, 저(疽)는 걸린다는 뜻이다. 혈기가 막히고 찬 기운과 열이 흩어지지 못할 때 생긴다."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정창이 생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아픈 것, 가려운 것, 창양, 옹종이 생길 때 속이 답답한 것은 다 화열에 속한다. 불에 가까이 하면 처음에 가렵고, 몹시 뜨겁게 하면 아프다. 불에 닿으면 헌 데와 딱지가 생긴다. 이것은 다 화(火)의 작용이다."
정조를 평생 진료한 주치의는 강명길(1737~1801년)이다. 32세 때 의과에 급제해 이듬해 내의원으로 들어갔다.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친분이 있어 임금이 되자 바로 수의(首醫·내의원에 속한 내의(內醫)의 우두머리 의원)가 됐다. 정조는 '홍제전서(弘濟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자신의 체질과 치료 처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나는 젊었을 적에 몸에 열이 많아서 음식을 겨우 먹었으므로 날마다 우황과 금은화 따위를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수의 강명길이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고암심신환을 처방해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10여 년 동안 환약으로 복용했다는 것이다. 가미소요산이라는 처방과 청심연자음이라는 처방을 꾸준히 복용해 건강을 유지했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한의학에선 치료를 '균형'으로 정의한다. 열이 나면 보통 열을 내리는 데 치중하는데, 강명길은 열을 내리는 목적에만 중심을 둔 게 아니라 열을 내리면서도 식욕을 돋우거나 신체의 허약을 회복하는, 보(補)와 사(瀉)를 겸한 치료법으로 정조의 신뢰를 얻었다.
고암심신환은 화증을 치료하는 보약이다. 진짜 열이 아니라 허화(虛火)로 가슴이 답답하거나 잘 놀라면서 뼈와 살이 말라 들어가는 증상 치료에 적합하다. 허증을 기반으로 처방했다는 건 정조가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여름이 되면 소화 기능이 떨어지듯 정조는 열이 나서 음식을 챙기지 않았다. 대다수 임금이 하루 5번 음식을 먹었지만 그의 행장에 따르면 하루 두 끼만 먹을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고 한다.
청심연자음도 마찬가지다. 연꽃의 씨앗인 연밥이 주재료인 처방이다. 연꽃이 마음의 평정을 이루듯 번뇌를 씻어 마음을 맑게 하고 정신을 보양하면서 허한 증상을 보충하는 것으로 알려진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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