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 재위 1720∼1724). 숙종과 희빈 장옥정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세자 때부터 신변, 정치와 관련해 갖은 수난을 겪은 비운의 왕이었다. 32세에 왕위에 올라 재위 4년간 병치레만 하다 생을 마감했다.
경종의 재임기는 소론과 노론이 세제(世弟·연잉군, 후일 영조) 책봉을 두고 피의 숙청(1, 2차 신임사화)을 벌인 당쟁의 절정기였다. 자식이 없고 병약해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했지만 노론의 압박으로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물러날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소론의 지지로 다시 친정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고 있었다. 실록 곳곳에 경종의 "이상한 병"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10여 년 이래로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 (재위 1년 10월 10일)
"도승지 김시환이 나랏일을 의논하기 위해 들어왔는데 의관들의 입진 후 화열이 오른 상의 심기가 대발(大發)했다. 여러 신하가 놀라 두려워하며 물러갔다." (재위 2년 3월)
"상이 동궁에 있을 때부터 쌓인 걱정과 두려움으로 마침내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을 앓았다. 해가 지날수록 고질이 됐으며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혼미한 증상도 있었다. (…) 곤담환과 우황육일산 등의 처방을 썼지만 효험이 없었다." (재위 4년 8월 2일)
간질과 발작
경종이 말한 "이상한 병" "형용하기 어려운 질병"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종이 복용한 약물은 그의 질병을 알려주는 핵심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집중적으로 복용한 약물은 가미조중탕이었다. 경종 즉위 원년부터 재위 2년, 3년에 걸쳐 150첩 이상 복용했다. 어떤 일에도 잘 나서지 않고 적극성을 보이지 않던 경종은 이 약만큼은 작심한 듯 계속 지어 올릴 것을 의관들에게 주문한다. 그만큼 약효가 좋았다는 뜻이다.
가미조중탕은 일반적으로 대조중탕과 소조중탕으로 나누는데, 고종의 어의이자 국내 최초의 근대적 한의학 교육 기관 동제의학교 교수를 역임한 청강(晴崗) 김영훈(1882~1974년)의 기록에 따르면 경종이 먹은 가미조중탕은 소조중탕으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전체에 나타난 가미조중탕의 처방 기록은 총 50회 정도로 정조와 순조에게도 투여한 기록이 나온다. 경종에게는 무려 42회가 처방됐다. <동의보감> '열담(熱痰)' 조문에 나온 소조중탕의 기록은 이렇다.
"열담이란 곧 화담(火痰)이다. 번열이 몹시 나서 담이 말라 뭉치고 머리와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다. 눈시울이 짓무르면서 목이 메어 전광증이 생기는 증상에는 대·소조중탕이 좋다."
<동의보감>은 또한 경종에게 쓰인 또 다른 처방인 곤담환의 치료 목표를 놓고서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전광증은 현대 의학으로 말하면 뇌 구조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정신 착란이나 정신 분열증의 여러 증상을 가리키는 질병으로 때 아닌 발작을 일으키는 게 특징이다.
"습열과 담음이 몰려서 생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한다. 속을 끓이고 소원이 풀리지 않아서 전광증(癲狂症)이 생기는데 하루 100알씩 먹는다."
<동의보감>에 나타나는 소조중탕과 곤담환의 공통적 치료 목표는 전간(癲癎)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간질이다.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둘째 오빠 민진원은 영조 4년 궁중에서 일어난 사건을 초록한 책 <단암만록>에서 경종의 정신과적 증세를 이렇게 묘사한다.
"숙종 승하 시 곡읍(곡하며 우는 행위)을 하는 대신 까닭 없이 웃으며 툭하면 오줌을 싸고 머리를 빗지 않아 머리카락에 때가 가득 끼어 있었다."
경종의 간질 증상을 유추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은 숙종 15년 11월 8일 실록에 쓰인 '경휵(驚搐)'이란 단어다.
"원자(경종)에게 경휵의 증세가 있어 약방의 여러 신하가 청대하여 조양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다."
여기에서 '경'은 '놀란다'는 뜻이고 '휵'은 '경련' '쥐가 나다'란 의미의 발작성 경련과 간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 SBS 드라마 <장옥정>에서 장희빈(김태희)과 경종.
실제로 경종은 평생 비만 체형이었다.
돌팔이 이공윤
많은 드라마에서 경종의 모습은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26세 때인 1714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 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땀이 많이 나는 질환을 앓았다.
이런 경종의 비만병 치료에 이공윤이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조선 후기의 유의(儒醫)로 알려져 있지만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공윤에 대한 평가를 담은 실록 기록은 이렇다.
"경종 2년 천거된 후 약방에 들어가 임금의 병환을 모셨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을 자주 복용해 설사를 하고 나면 몸 내부가 깨끗이 청소되고 임금의 병환이 금방 나을 수 있다고 해 실제 시험해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공윤은 오히려 방자하게 노기 띤 눈으로 스스로 의술을 자랑하며 시평탕에 대황, 지실 등 설사하는 약을 재료로 처방해 일백하고도 수십 첩을 임금에게 지어 올렸다. 그러자 임금의 살은 빠지지 않고 비위 등 내장만 허해졌고, 오히려 음식을 싫어해 물리는 날 수가 많아지면서 한열(寒熱·오한과 발열)의 증세까지 생겼다."
이공윤이 의학과 관련해 기록에 등장한 것은 경종 이전 숙종 35년, 유천군 이정과 더불어 의약동참(議藥同參)에 뽑히면서부터였다. 의약동참이란 조선 시대 내의원 소속의 의관으로 주로 임금이나 왕비, 세자 등의 병을 치료한 의관으로 정원은 12명이었고 모두 어의로 불렸다. 이후 춘천의 제방 쌓는 일에 개입해 부당하게 뇌물을 받은 일로 중죄인이 되어 양산에 유배됐지만 경종의 질병이 악화되면서 복귀한다.
숙종 때 같은 유의인 유천군 이정이 '도수환'이라는 공격적인 약재로 왕의 질병을 치료했듯 이공윤도 감수나 대황 등 공격적인 약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공윤의 처방은 늘 주변의 우려를 자아냈다. 경종 4년 사헌부는 이공윤을 "사판(仕版·벼슬아치 명부)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청한다.
"이공윤은 괴벽하고 미련한 데다 행동과 모습마저 대체로 해괴한 데가 많습니다. 유의라 하여 의약동참에 뽑혔으나 매양 차례가 되는 날마다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누차 부른 뒤에야 느릿느릿 나와서 여러 의관의 입만 쳐다보다가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답하고 정성들여 깊이 연구해보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종이 세상을 등질 때까지 마지막 진료를 담당한 것은 불행하게도 이공윤이었다. 그의 공격적 처방과 복약 지시는 끝까지 계속됐다. 경종 4년 8월 19일 식욕이 줄어들고 원기가 떨어지자 비위를 좋게 하는 육군자탕을 처방한 후 20일에는 게장과 생감을 먹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게장과 생감을 먹은 경종은 밤에 갑자기 가슴과 배가 조이는 통증을 호소했다. 복통과 설사를 진정시키기 위해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는데도 차도가 없자 "설사를 그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계속하며 이번에는 계지마황탕을 처방한다.
계지마황탕 속의 마황은 허약한 사람에게는 결코 투여할 수 없는 약물이다. 마황의 별명은 청룡이다. 용처럼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땀을 내는 무서운 약이다. 필로폰 성분을 함유한 강력한 진통제에 견주는 약물이다. 위장이 허약한 사람이 먹으면 침을 증발시켜 입맛이 없어지기 때문에 다이어트 약물로도 쓰이는데, 그 부작용이 엄청나다.
계지마황탕을 먹은 후 경종의 환후는 더욱 위태로웠고 맥박이 약해졌다. 이복동생이자 세제인 영조는 인삼과 부자로 위장의 온기를 올리는 처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공윤은 이때에도 다시 한 번 영조의 처방을 조목조목 따지며 반대 의견을 피력한다. "신(臣)의 처방 약을 쓰면서 인삼도 쓰면 기를 능히 돌리지 못한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결국 인삼을 마시고 난 경종의 눈빛은 좋아졌고 콧등도 따뜻해지면서 반전의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흥분한 영조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자기 의견만 내세우고 인삼 약재를 쓰지 못하게 하느냐고 강하게 이공윤을 힐책한다.
게와 감이 부른 참극
경종은 이후 얼마 안 돼 숨을 거뒀다. 즉위 4년 8월 25일이었다. 경종이 숨을 거두자 시중에 독살설이 확산됐다.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라고 권유한 사람이 영조였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은 영조가 임금이 되고 30여 년이 지난 후 큰 사건으로 불거졌다. 일명 '신치운(1700~1755년) 사건'이다.
신치운은 경종과 영조 때의 문신으로 영조 때 소론이 노론에 밀려 숙청당하는 데 앙심을 품고 모반을 꾀하다 처형된 인물이다. 사건의 시작은 신치운이 모반으로 친국(親鞫)을 받으면서 한 말로부터 시작된다. 영조 31년 5월 20일 신치운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상(영조)이 왕위에 오른 갑진년(1725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이 말을 들은 영조는 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살을 짓이기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해명했다.
"대왕대비(인원왕후·숙종의 둘째 계비)께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자성(慈聖·임금의 어머니)의 하교를 듣고서야 그때 경종에게 게장을 진어(進御·임금이 먹는 것)한 것이 내가 보낸 것이 아니라 어주(御廚·수라간)에서 공진(貢進)한 것을 알았다. 경종의 죽음은 그 후 5일 만에 있었는데 무식한 하인들이 지나치게 진어한 것이다. 그들이 고의로 사실을 숨기고 바꾸어 조작하였다."
영조는 게장과 생감을 경종에게 먹도록 한 것이 자신이 아님을 누누이 강조한다. 사실 경종에게 바친 게장과 감의 궁합이 상극이며 함께 먹으면 절대 안 되는 음식이라는 것은 의관이 아니라면 알기 힘들다. 게장과 감이 상극의 음식이라는 점은 주로 한의서에 나오기 때문이다. 한약물의 고전 <본초강목> 감나무 편은 "감과 게를 함께 먹으면 복통이 일어나고 설사를 하게 한다. 감과 게는 모두 찬 음식이다"라면서 실제 경험까지 기록해뒀다.
"혹자가 게를 먹고 홍시를 먹었는데 밤이 되자 크게 토하고 토혈(吐血)까지 했으며 인사불성이 됐는데 목향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게장과 감은 멀쩡한 사람을 죽게 만들 만큼 독약은 아니지만 지병이 있거나 소화기 계통이 약한 사람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경종은 14세 무렵, 생모인 희빈 장 씨가 사약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끊임없는 당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더욱이 간질에다 비만 체질로 인한 복통을 달고 살았던 그에게 게장과 감의 음식 조합은 치명타였음이 분명하다.
'신치운 사건'은 결국 이공윤의 자식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이공윤은 영조 즉위 후 경종의 치료에 대한 대신들의 이의가 제기되자 그 책임을 지고 유배를 간 후 그곳에서 죽었지만, 신치운 사건으로 화가 날 대로 난 영조는 경종이 죽은 지 31년이 지났음에도 그때의 과오를 물어 이공윤의 아들 이명현을 처형했으며 이명현의 아내와 아들들은 노비로 만들었다. 이공윤의 형제들은 북도로 유배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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