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醫學/낮은 한의학

사라진 북벌의 꿈? 효종 독살의 진실은…


갈증과 열 식히는 蓮

효종 7년 4월 20일의 <승정원일기>에는 효종의 증상을 확실하게 소갈로 보고 '맥문동음(麥門冬飮)'이라는 처방을 낸 기록도 있다.

<동의보감>은 소갈에 대해 "심장이 약해(心虛) 열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하며, 가슴 속이 달아오르면서 답답하고 편치 않아 손발을 버둥거리는 증세(煩躁)가 나타나고, 목이 말라 물을 자주 마시고 소변이 자주 마렵다"고 규정하는데, 이는 효종이 기질상 보여주는 화병과 번열(煩熱), 구갈(口渴) 등의 증상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동의보감>에서 이런 소갈 증상에 주로 권유하는 약물은 연뿌리 즙 오미자 맥문동 천화분 인삼 등인데, 실제 효종에겐 연자죽과 연자육(蓮子肉)이 든 청심연자음, 양혈청화탕이 자주 처방됐다.

진흙탕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불교에선 청정한 불심(佛心)의 상징이다. 한의학의 눈으로 보면 그 의미는 더 깊다. 연(蓮)은 욕망의 불을 물로서 진정하는 작용을 한다. 붉은 연꽃과 푸른 연잎은 모두 뿌리가 끌어당긴 수분과 영양에 의존해 자란다. 물에 잠기면 뿌리, 줄기(연대), 잎이 모두 죽는다. 반대로 물이 마르면 가지와 잎은 시들지만 뿌리는 죽지 않는다. 연뿌리는 물을 끌어올려 무더운 여름의 열을 식히고 푸름을 유지한다. 상부의 열을 식히면서 촉촉하게 하는 작용이 당뇨의 갈증과 번열 증상을 식혀주는 효능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약으로 주로 쓰이는 부분은 연꽃의 열매인 연자육이다. 흔히 연밥으로 불리며 꽃이 지고 씨방 속에서 생겨난다. 연이 세상의 온갖 번뇌를 꽃으로 피워내듯, 연자육은 마음에 맺힌 열을 풀어내 콩팥으로 배설한다. 청심연자음이란 처방의 군약(君藥·처방에서 가장 주가 되는 약)으로 쓰이는데 흔들렸던 평상심을 안정시킨다. 특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목마름, 다리가 약해지는 상열하한(上熱下寒) 증상을 치료한다. 화병이나 만성 질환, 특히 당뇨병 고혈압 성기능 쇠약(조루 증상)에 효능이 크다.

교수형당한 어의

효종의 잦은 감기와 소갈증은 결국 화를 불렀다. 소갈증이 부른 종기가 화근이었다. <동의보감> 소갈 편에는 "소갈병의 끝에 종기가 생긴다"고 경고한다.

"소갈병이 마지막으로 변할 때 잘 먹으면 뇌저(腦疽)나 등창이 생기고, 잘 먹지 못하면 반드시 중만(中滿·배가 그득하게 느껴지는 증상)이나 고창(배가 땡땡하게 붓는 병)이 생기는데 이것은 다 치료하기 어려운 증상이다."

효종은 결국 즉위 10년 만인 1659년 5월 4일 종기 때문에 숨을 거뒀다. 직접적인 사인은 머리 위(뇌저)에서 시작해 얼굴로 번진 종기였다. 일부에선 효종이 사망 두 달 전 송시열과의 기해독대에서 자신의 건강을 자신했다는 점을 들어 '효종 독살설'을 주장하지만, 한의학적 관점에서 추론해보면 이는 임금의 건강을 책임진 어의 등 의관들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진료 상황을 꼼꼼히 묘사한 실록과 <동의보감>의 기록을 대조해보자.

"상이 침을 맞는 것의 여부를 어의 신가귀에게 하문하니 '종기의 독이 흘러내리며 농증이 생기려고 하니 반드시 침을 놓아 나쁜 피를 뽑아낸 연후에야 효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반면 어의 유후성은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 상이 신가귀에게 침을 잡으라고 명해 침을 맞았는데 침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상이 이르기를 '가귀가 아니었으면 병이 위태로울 뻔하였다'라고 했다. 그런데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솟아 나왔다. 침이 혈과 경락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출혈이 멈추지 않으면서 상이 승하하였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소갈의 금기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병이 생긴 지 100일이 지났으면 침이나 뜸을 놓지 못한다. 침이나 뜸을 놓으면 침이나 뜸을 놓은 자리에서 헌 데가 생기고 그곳에서 고름이 나오는데 그것이 멎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

소갈병의 금기는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는데, 현대의 당뇨병 환자에게도 한의학적 지침이 될 만하다. 첫째는 금주, 둘째는 금욕(성생활을 금하는 것), 셋째는 짠 음식과 국수다. 기름진 음식과 향기로운 풀, 광물성 약재를 쓰는 것도 금기 대상이다.

어쨌든 어의 신가귀는 "소갈병 환자에게 침을 놓으면 죽을 수 있다"라는 말이 한의학의 교과서인 <동의보감>에 분명하게 나와 있는데도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고 말았다. 신가귀는 시침을 말린 동료 유후성과 함께 효종을 돌보던 6명의 어의 중 한 명으로, 무인 출신이지만 침을 잘 놓아 인조가 특별히 의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진료 기록을 자세히 보면 신가귀가 <동의보감>의 금기를 어긴 것이 이때가 처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효종 9년 7월 3일 신가귀는 효종의 종기에 침을 놓는다. 실록에는 "족부에 생긴 종기에 침을 놓은 자리에서 진액이 흘러나오면서 멎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신가귀는 이때도 효종의 종기를 소갈병의 연장선에서 보지 못했다. 무인 출신으로 침에는 밝았을지 몰라도 병증의 연관관계는 잘 몰라 실수를 범한 듯하다.

하지만 신가귀의 족부 사혈요법은 효종의 피가 멈추면서 일부 효과를 봤다. 신가귀는 이를 바탕 삼아 이듬해 5월에도 똑같은 시술을 하다 효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족부 종기를 치료받은 효종은 어의 유후성의 만류에도 불구, 지병으로 집에서 요양하던 신가귀를 억지로 불러내 얼굴의 종기를 찔러 피를 내게 함으로써 죽음을 자초한 셈이 됐다.

이 일로 신가귀는 효종 사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동료 어의들도 유배를 가거나 곤장을 맞았다. 당초 신가귀는 허리를 베어 죽이는 참형에 처해질 예정이었지만 효종의 맏아들인 현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종기는 찌르는 게 맞지만…

효종은 세 차례에 걸쳐 종기 증상을 앓았는데, 효종 9년 1월 21일에 시작된 팔 부위의 종기와 같은 해 6월 8일 낙상으로 시작된 족부 어혈증상으로 인한 부기, 효종 10년 4월 27일에 시작된 머리 부위의 종기다. 효종 10년 윤 3월 9일 예조판서 홍명하의 말을 담은 실록의 기록은 효종의 종기 증상이 소갈병, 즉 당뇨병에 의해 생긴 합병증임을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지난해 성상께서 마루에 떨어졌던 우환은 전고(前古)의 제왕들에게는 없던 환액(宦厄)이었습니다."

다리를 다쳤으면 삐거나 부러지거나 멍이 들었어야 하는데 효종의 증상은 달랐다. 발이 붓고 힘이 없으면서 말라 들어가 통증이 너무 심했다. 이는 바로 당뇨의 후유증으로 생긴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당뇨병 환자의 3분의 1 정도에서 말초신경병증과 혈관 질환으로 족부 증상이 일어난다고 밝히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효종의 족부 증상은 소갈증에 의한 합병증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효종의 죽음을 두고 침을 놓은 어의 신가귀가 손을 떠는 수전증을 앓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신가귀가 침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침 자리는 효종의 종기 치료나 죽음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엽적 문제일 뿐이다. 비록 신가귀는 이때의 실수로 교수형을 당했지만 그것은 소갈에 대한 무지의 결과였지 수전증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신가귀가 종기를 사혈 침으로 치료한 것은 소갈병의 합병증만 아니었다면 잘못된 게 하나도 없었다. 신가귀를 말린 동료 어의 유후성도 산침(散鍼)으로 효종의 눈 주위 종기를 치료한 바 있다. 산침은 중국 명나라 때 의서인 <의학입문>에도 나오는 것으로 경락상의 혈 자리에 침을 놓지 않고 병소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아픈 곳을 따라 찌르면서 침을 놓아 피를 빼는 방식이다.

이처럼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은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고려가 만든 것이란 주장도 있다)이자 <동의보감>의 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내경> 소문에는 "중국의 동쪽 지역은 물고기를 먹고 짠 음식을 좋아해서 옹양(癰瘍), 즉 종기의 질병이 많은 곳으로 폄석(돌로 만든 침)으로 치료한다"는 조문이 있다. 우리나라가 예부터 식습관으로 인한 종기가 많은 나라로 지목된 것. 침구법을 집대성한 <황제내경> 영추의 옥판(玉板) 편은 "고름 피가 잡힌 경우에는 오직 폄석이나 피침(곪은 곳을 찢는 침) 봉침(벌의 침)으로 종기를 찔러서 피고름을 빼내는 방식"을 정석으로 권하고 있다.

<동의보감>도 마찬가지로 "종기가 곪을 때는 열십자로 찢고 고름을 배출하는 것이 좋다"며 "절개해서 고름을 빼내라"고 충고한다. 두텁게 살 깊숙이 생긴 종기를 침으로 깊이 뚫어 여는 낙침법(烙鍼法)도 소개했는데,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침을 달궈서 쓰도록 하고 있다. 침을 찔렀는데도 고름이 바로 나오지 않으면 털 심지나 종이 심지를 꽂아 넣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는 뒤처리 방법까지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드라마 <마의>는 史實?

거머리를 이용한 종기 치료법도 나온다. 종기에 물로 적신 종이를 얹으면 빨리 마르는 지점이 꼭대기인데 그곳에 거머리를 올려두면 피와 고름을 빨아먹는다는 얘기다. 피고름을 빨아먹은 거머리는 반드시 죽는데 물에 넣으면 살아난다고 치료 경험담까지 기록해 놨다.

얼마 전 한방 외과술을 주제로 한 <마의>라는 TV 드라마가 인기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관념에 얽매여 한의학에는 외과학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반인의 선입관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파격적 내용이 많아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실제 많은 이가 한의학에는 신체에 칼을 대는 외과학이 아예 없었을 거라고 여기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밝힌 모든 종기 치료법들은 외과학 그 자체다. 다만 서양 외과학이 메스, 즉 칼을 주로 쓰는 반면 한의학에선 여러 종류의 침을 쓸 따름이다.

과연 우리 한의학은 드라마 <마의>의 주인공 백광현(1625~1697·숙종 때 어의)처럼 머리에 구멍을 뚫어 뇌종양을 치료하고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할 만큼의 대담무쌍한 외과학의 전통을 가졌을까. 과연 한의학적 외과술이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마의의 치료술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종기 때문에 한평생 고생하다 죽은 현종 편에서 자세하게 알아보기로 하자.